인간 고유의
예술, 그 본질을 되묻다
순수미술은
언제나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지층을 건드려 왔다. 그것은 단지 미적 대상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행위였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지만,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 안의 감정을 외화하는 순간, 실용의 경계를 넘어서 정신의 세계로 진입한다. 예술은 바로 이 경계에서
발명되었고, 문명을 정의해온 본질적 행위였다.
기원전 동굴
벽화에서부터 현대의 실험적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늘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고 앞서갔다. 그리고 그 속에는 늘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기술이 아닌 사유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순수미술의 기원이자 본질이다.
자본주의가
예술을 삼키는 방식
현대 자본주의는
예술을 시장의 질서로 편입시키며, 그 의미와 가치를 물화시켜왔다. 예술이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상품’으로 규정되는 순간, 창작은 점차 시장의 요구에 반응하는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작품의 가치는 내적인 깊이나 미적 성취보다도, 거래
이력, 수집가의 이름, 전시 이력, 낙찰가와 같은 외형적 지표로 환산된다.
이는 생산과
감상의 주체였던 인간을 소비자로 전환시키는 구조다. 예술은 더 이상
'읽히는' 것이 아니라 '팔리는' 것이 되었고, 관람은 해석이 아니라 소비 행위로 변했다. 작품은 갤러리와 옥션을 통해 ‘시세’로 분류되고, 미술가는 자신이
속한 시장 지형 속에서 유통되는 브랜드가 된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예술 내부로부터 균열을 일으킨다. 점점
더 많은 예술가들이 시장을 의식하고, 트렌드를 탐색하며, 잘
팔리는 형식과 테마를 택한다. 물론 예술가도 생존을 위해 전략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 과정에서 예술의 본질적 질문은 점점 희미해진다.
AI
시대의
도래, 창조의 경계는 어디인가
AI는 이미 인간의
인지 영역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텍스트를 쓰고, 이미지를
만들며, 음악과 영상 콘텐츠를 생성하는 이 기술은 예술의 영역마저 넘보고 있다. 생성형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해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디지털 드로잉, AI 작곡, 시와
산문, 심지어 페인팅까지. 언뜻 보면 인간 창작자와 다를
바 없는 작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과연 창작인가, 아니면 복제인가? AI가 만들어내는 것은 감각의 조합이 아니라, 확률의 계산이다. 의미의 구조가 아니라, 데이터의 통계다. AI는 맥락 없이 모방할 수 있지만, 실존적 사유나 감정의 결에서
비롯된 ‘의미’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AI의 본질은
‘효율과 자동화’다. 반면 예술의 본질은 ‘불확실성과 감내’다. 창작은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과 함께 작동하며, 인간은 그 실패를 통해 새로운 감각을 발견해왔다. 즉, 예술은 정답을 산출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질문을 형성하고 감각을 변형하는 행위인 것이다.
창작의 고유성은
무엇으로 남는가
우리는 지금
‘창작자’와 ‘창출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진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창작이 단지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면,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삶을 ‘견디는’
방식으로서의 예술이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고, 기억을 가지고, 고통을 감내하며,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감정과 사유의 깊이는 인간 정신만이 품을 수 있는 것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인간의 고통, 갈망, 죄의식, 용서, 사랑, 실패와 같은 감정의 층위는 단순히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다. 예술은
이 모호한 감정의 흔들림 속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론적 긴장과 감정의 누적이 없이는 진정한 예술도 없다.
순수예술의
위치 –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해지는 것
많은 이들이 AI로 인해 순수예술이 위기에 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이야말로 순수미술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기다. AI는 결과물을
만들지만, 예술은 과정을 드러낸다. AI는 계산을 하지만, 예술가는 ‘견딘다.’ 이 견딤 속에서만 진정한 감각의 질서와 질문이
생겨난다.
순수미술은
바로 이 불필요함, 비효율성, 비가시성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지켜낸다. 그것은 생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목적으로 작동한다. 효율을 추구하는 시대일수록, 무의미해
보이는 것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야말로 예술이 해야 할 일이다.
예술은 반드시
유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쓸모없음’을 통해 인간다움의 최후의 보루를 지킨다. 순수예술은 불확실성 속에 남아 있는 감정과 감각, 감응을 위한 공간이며, 이 공간이야말로 인간이 기계와 구분되는 자리이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 그리고 새로운 감각의 역할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은 자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본질은 수준이나 양식의 차이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방식’에
있다. 상업예술은 수요와 반응을 기준으로 움직이며, 순수예술은
질문과 사유를 전제로 움직인다. 이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일수록, 순수미술은
그 지향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기계는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지만, 예술가는 감각 속에서 무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인간 예술의 힘이며, AI 시대에 더욱 중요한 역할이다. 디지털
이미지가 넘치는 세상일수록, ‘보이지 않는 감각’을 일깨우는 작업은 더 절실해진다. 그리하여 예술은 단지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과
존재의 반성을 이끄는 도구가 된다.
결론: 인간 정신의 마지막 거점으로서의 예술
우리는 지금
수단과 목적이 혼재된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술은 인간 정신의 최종 목적에서 멀어지고,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로만 남고 있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질문하고, 느끼고, 창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I가 아무리
빠르게 이미지를 만들어도, 예술가의 느린 사유와 실패를 감수하는 용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예술을 보호하고, 질문을 환영하며, 감정의 깊이를 되살리는 일이다. 예술은 인간의 사치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본질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시대에 예술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며, 순수미술을 지켜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