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지원, 마지막 방어선의 붕괴

공공성은 예술의 최후 방어선이었다. 예술이 시장 논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 자본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창작의 본질적 가치를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공공기관의 예술지원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공공 예술지원 제도는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매년 반복되는 유사한 형식의 지원내용과 심사, 그리고 형식적 브리핑과 몇 가지 단편적인 지표로 구성된 지원 체계는 점점 더 행정의 편의성에 맞게 관료화되었고, 실질적인 창작 환경이나 예술의 본질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행정적 증명과 행사의 표면적 성과에 집중하는 구조로 고착화되고 있다.

지원은 있으나 도달하지 않으며, 제도는 존재하되 기능하지 않는다. 예술가를 위한 제도이지만 정작 예술가의 삶과는 멀어져 있고, 실험적 창작보다 ‘제도에 적합한’ 창작이 유리한 현실 속에서 창작은 점점 기능적 선택으로 축소된다.

이는 단지 행정의 비효율이나 제도 설계의 문제가 아니다. 창작의 진정성과 예술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구조적 위기의 징후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를 넘어서 “왜, 누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함께할 것인가”를 다시 묻고 설계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제도화된 지원이 만든 왜곡된 생태계

1. 입시화된 지원 제도: ‘잘 아는 자’만이 통과하는 좁은 문

한국의 공공 예술지원은 시험제도처럼 작동한다. 일률적이고 정형화된 양식, 마감일에 쫓긴 서류 중심의 심사, 그리고 발표 내용의 정량 평가.

이 과정에서 ‘예술가의 태도’나 ‘작업의 내적 확장 가능성’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오히려 시스템에 얼마나 정통한가, 행정 언어를 얼마나 잘 구사하는가가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정보 접근성’과 ‘행정 대응력’은 예술가의 역량과 무관하게 당락을 가르는 비공식 조건으로 작동하며, 묵묵히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보다는 기획안 작성과 제도 활용에 능한 ‘지원 전략가’들이 유리한 구조다.

이는 한국 사회의 입시 시스템과 닮아 있다. 수능 점수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듯, 잘 짜인 지원서와 포트폴리오가 창작의 생존 조건이 된다. 결과적으로 공공지원은 ‘가능성 있는 것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심사의 조건과 형식적 틀에 맞게 준비된 자들을 위한 통로가 되고, 창작의 다양성이나 작업 방식, 새로운 실험, 정량화할 수 없는 예술적 태도는 이 구조 안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2. 유목화된 창작: 지원이 목적이 되어버린 현실

또 다른 문제는 지원 프로그램이 창작의 기반이 아닌 목적 자체가 되는 현상이다. 작가들은 한 레지던시에서 다음 레지던시로, 한 지원 사업에서 다른 사업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일종의 ‘지원 유목민’이 되어간다. 이는 단기적 생존 전략으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으나, 그 안에서는 작가의 내면에 집중한 긴 호흡의 창작이 불가능해진다. 작업은 점점 지원 조건에 맞춰 조정되고, 창작의 방향은 제도의 프레임에 맞춰 형식화된다.

더불어 각 지원기관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반복되는 형식적 작업, 프로젝트 중심의 일회성 결과물은 작품의 내적 진화보다 외적 명분을 충족시키는 데 더 집중하게 만든다.

이는 예술을 제도 안에 가둠으로써 예술 자체가 지닌 불확실성과 실험성, 무목적성이라는 본래의 가치를 지우는 결과로 이어진다.
 
 
3. 비평 없는 평가, 관리 없는 운영

공공기관 내부 행정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 또한 심각한 문제다. 지원 사업의 평가는 대부분 형식적이며, 예술적 내용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나 비평적 관점은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평가위원은 제한된 시간과 형식 안에서 ‘성과지표’만을 근거로 판단하고, 실질적인 창작의 진화 과정이나 작가의 철학적 맥락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공공기관은 작품 판매금액, 관람객 수, 언론 노출 횟수 등 외적으로만 드러나는 정량적 수치로 자신들의 행정성과를 입증하려 하며, ‘작가의 성장’이나 ‘작업의 전환’ 같은 본질적 변화는 측정조차 되지 않는다.

또한 지원 이후의 성과 추적이나 장기적 관찰, 후속 피드백 시스템은 부재하거나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 작가와 작품은 그렇게 단기성과 중심의 행정 소비재로 전락하고, 예술은 점점 더 표면적이고, 일회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공공성의 회복이 곧 예술 생태계의 회복이다

공공지원의 본래 목적은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실험적이고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 하지만 지금의 공공지원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기보다는 또 다른 자본주의적 경쟁과 도태 시스템저럼 작동되고 있다.

진정한 공공성은 그럴듯한 행정 시스템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를 동료이자 협력자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현실적 전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지원의 평가 기준을 보다 유연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성과나 외형적인 수치 중심의 평가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작업이 지닌 고유한 맥락과 태도를 읽어낼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하다. 물론 공공성은 객관성을 전제로 하지만, 다양한 창작 방식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평가의 폭을 넓히는 시도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예술 분야별 특성을 고려한 평가 지침 마련이나, 과정을 중시하는 항목의 비중 확대가 가능할 것이다.

또한, 프로그램의 기획과 운영 과정에 보다 다양한 주체의 참여가 요구된다.

현재는 행정 주체를 중심으로 설계된 지원 구조가 대부분인데, 예술가, 비평가, 독립 기획자 등 현장 전문가들이 처음 프로그램의 기획단계에서 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이는 다양한 시각을 반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장의 흐름과 행정 시스템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으며 나아가 좀 더 현장중심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이 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지원 이후의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체계적인 피드백 시스템이 필요하다.

선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작가의 활동을 일정 기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이후 사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운영 방식은 지원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일회성 지원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흐름 안에서 작가의 성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술가와 기관 간의 관계를 보다 유기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선정’과 ‘관리’의 관계를 넘어서, 함께 고민하고 협력할 수 있는 동반자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원 사업이 종료된 이후에도 예술가가 기관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자신의 작업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면, 공공지원은 일시적 수단이 아니라 창작 기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누구를 위하여 공공 지원 프로그램은 존재하는가?

지원은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라, 예술 생태계를 함께 지켜가기 위한 공동의 약속이다. 예술은 평가와 통과의 대상이기 이전에, 진정한 관심과 대화가 필요한 문화적 실천이며, 행정은 그 실천이 지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공공 지원은 창작자와 행정, 전문가와 시민이 각자의 위치에서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나누는 과정이며, 예술이 사람과 사회 속에서 다시 숨 쉬기 위한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 관계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원은 수혜가 아니라 공동의 책임이다. 행정은 입시나 통제, 관리 시스템이 아니라 상생과 협력을 위한 기초가 되어야 한다. 예술은 통과해야 할 관문이 아니라, 예술의 존재 가치와 이유에 대해 서로 질문하고 서로 돌보아야 할 지속적인 생태계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를 묻는 방식으로 진정한 예술적 가치가 사람의 본질과 만날 수 있도록, 공공이 다시 창작의 바탕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새롭게 전환해야만 한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