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화시대’의 거울 앞에서
“문화산업은
예술을 상품으로 만들고,
그 상품은 교환가치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더 이상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차원에만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미술 작품은 시장의 평가 시스템 속에서 가격으로 환원되며, 작품의 생명력 또한 투자
가능성에 따라 연장되거나 사라진다.
이에
따라 작품의 본질은 컬렉터의 포트폴리오속에서 자본에 종속되며, 경매 차트의 곡선 속에서 환영과 허상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예술은 점차 시장 생태계의 부속품으로 재편되며 창작의 본질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버렸다.
AI 시대의 도래는 이 물화 과정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알고리즘은 ‘수익성 있는 미감’을
분석해 시장이 원하는 형식을 재현하고, 인간 고유의 창작 영역마저 데이터 패턴으로 치환해 가격화할 것이다.
인간
실존의 거울이자 창조 정신의 바로미터의 역할을 해 온 순수미술이 이러한 흐름에 올바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 미래는 회복 불가능하며 자본과 인공의
그늘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순수미술은
과연 이 거대한 물화의 파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Art is Art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다.”
– 파울 클레(Paul Klee)
예술은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만의 독창적인 감각과 사유의 방식이다. 훌륭한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쾌감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며, 존재·사회·시간·인간 조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미술사의
결정적 전환점—르네상스 인문주의, 인상주의의 시각 혁명, 20세기 아방가르드의 해체—모두 시장의 요구가 아니라 작가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세계관의 변혁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예술의 본질적인 힘은 ‘무용성’과 ‘불편함’ 속에서 발현될 수 밖에 없으며,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뚫어내는 도전의 시각이 작품의 창조적 깊이를 만든다.
Money is Money
“가격은 사물의 가치를 말해주지 않는다.”
–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돈은
가치를 단순히 양적으로만 측정하고 교환 가능한 단위로만 만든다. 돈은 즉각적 결과를 원하는 욕망적 자본주의에
극단의 효율성과 이동의 편리성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질적 가치나 맥락적 의미를 평가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예술의 가치를 돈의 언어로 해석하려 하면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인 감동과 각성의 맥락이 모두 지워질 수 밖에 없다.
경매시장에서 ‘기록적인 낙찰가’는 세간의 이목과 호사가들의 관심은 끌겠지만, 그것이 역사적·문화적 가치의 척도는 결코 되지 못한다.
미학적
미술사적 평가, 즉 내면의 가치는 시간의 흐름과 시대적 사고의 변혁과 절대 비례할 수 밖에 없으며 그렇게
성숙한 밀도와 축적된 시각만이 인간의 내밀한 정신을 통하여 고도의 문명과 정신정 성취를 이룩해 내는 것이다.
Market is Market
“예술작품은 상품이 되는 순간, 그것의 본래적 사용가치는
지워진다.”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시장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유통되고 생존에 근본적인 조건을 제공하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예술
역시 이러한 시장의 역할이 필요하며 이를 통하여 작가들도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는 없다.
시장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필요 조건이지만 역사상 단 한번도 미술시장이 창작의 질과 비례한 적은 없다.
예술의
발전과 활성화는 자본과 맞교환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 고스란히 창작의 영역에서 자본과 무관하게 작동될 경우에만 그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은 그래서 위대하며, 역사적으로 위대한 컬렉터나 후원가들은 이러한 원칙에
철저했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그림 홍수,
1980년대 일본 버블기의 미술품 사재기, 21세기 글로벌 경매시장의 초고가 거래 등은
예술의 본질과 무관하게 가격 메커니즘이 폭주한 사례다.
물화시대에 순수미술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모든 진정한 예술은 저항이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자본주의 시대에서 예술·자본·시장의 균형이 무너지면 예술은 시장의 도구가 되고, 시장은 예술을
왜곡하며, 돈은 창작을 지배하는 규범으로 자리 잡는다.
이것은 지금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특정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동시대 미술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인적 자원 강화
한국
미술이 국제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장, 비평, 큐레이션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수준의 전문가를 길러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독립적인 비평가 네트워크, 전문 큐레이터 풀, 그리고
시장 분석가 집단을 조직해 창작, 기획, 유통 전 과정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운영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인적 인프라는 단순히 작품을 거래하거나
전시하는 차원을 넘어, 작품의 가치 평가, 전시 기획, 데이터 분석 등 한국 미술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 세계
미술계와의 장기적 교류망 구축
국제
미술계와의 교류는 단발적인 참여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외 유수 미술관과 갤러리, 비엔날레와 아트페어 등 주요 거점과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구축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작가, 기획자, 비평가가 국제 네트워크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동하고 협력하며, 한국 미술의 존재감을 확고히 할 수 있다. 국제화는
단순히 해외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 담론의 한 축으로 자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 신뢰를 담보하는 체계적 인프라 확립
국제
시장에서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료 아카이브, 거래 데이터베이스, 연구기관, 보존·복원
시스템 등 선진국 수준의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이를
위하여 작품의 진위, 거래 이력, 전시 기록을 표준화하고
디지털화해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며, 이는 미술이 단기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로 발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체계적인 인프라는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 시장에서 신뢰받는 기반이 된다.
이
세 가지 방향은 서로 분리된 과제가 아니라, 한국 동시대 미술이 세계의 주요 생산지이자 담론의 중심으로
성장하기 위해 동시에 추진해야 할 상호 보완적 전략이다.
전문성은
국제화를 견인하고, 국제화는 체계적 인프라의 필요성을 강화하며, 인프라는
다시 전문성과 국제화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미술이 창작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세계
미술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이 세 축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야 할 때다.
물화시대를 마무리하며
“미학은 상품의 논리에 저항할 때 가장 순수해진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이 연재를 통하여 우리는 자본주의와
미술시장이 예술의 가치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순수미술이 어떻게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아트페어나 경매 시장의 과열, 컬렉터 중심의 가치 왜곡, 제도적 인프라의 취약함, 그리고 AI와 데이터 알고리즘이 촉발하는 새로운 물화 현상까지—각 회마다 한국과 세계 미술시장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예술은
인간만의 고유한 행위의 결과물이며, 그 결과물도 결국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명제를 지키기 위해서”다.
순수미술은 인간의 사유와 감각을
확장하는 고유한 영역이며, 이는 가격이나 투자 수익률로 대체될 수 없는 가치다. 예술이 시장의 장식품이 되거나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라 부를 수 없다.
오늘날 물화는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글로벌 미술시장의 구조적 병폐이자 심각한 방향 착오다. 시장이
창작의 목표가 되는 순간, 작품은 가격의 껍질만 남는다.
예술·자본·시장이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균형을 이루는 것—그것이 물화시대 속에서 예술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 우리는 기술·자본·AI가 결합한 초(超)속도와 초동시대성의 시대 속에 있다. 인류는 스스로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자기 파멸마저 ‘아름다운 장면’으로 소비할 위험에 놓여 있다. 이 흐름을 방관한다면, 예술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까지 왜곡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서 한국
동시대 미술이 진정한 세계 허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바로 최고이자 최적의 기회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진 미술국가도 같은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작의 질과 다양성을
확보하고, 국제적 수준의 인프라를 구축하며, 본질을 지키는
예술가와 제도를 동시에 세워야 한다.
물화시대의 거울 앞에 선 지금, 우리에게 남은 길은 “예술을 자본의 그림자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을 위한 창조의 원형을 지켜내는 것”만이 순수미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의
미래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