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킴(b. 1995)은 퍼포먼스와 영상, 사운드, 설치, 텍스트를
주 매체로 활용해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폭력의 구조에 대해 작업한다. 특히, 작가는 식민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반화되어버린 성차별적, 인종차별적인
폭력들을 어떻게 예술을 통해 저항할 수 있을지 질문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루킴, 〈유럽인들이여, 가장 성스러운 것들을 지켜내라〉, 2019, Wood, acrylic paint on MDF, paper, silk, transparencies, LED lights, spotlight, contact microphone, amplifier, speakers, screens. Dimensions variable ©루킴
독일에서 태어나 키프로스, 캐나다,
한국, 브라질을 오가며 성장한 루킴은, 여러
문화권에서 마주한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통해 이에 내재한 폭력의 구조를 탐구하고 해체할 수 있는 예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이를 위해 루킴은 오늘날의 폭력을 파생시킨 역사들과 이를 증언하는 과거의 기록들, 그리고 이를 해체할 수 있는 개념적 방법론으로서의 철학 등을 리서치하며 작업을 구상해 나간다.

루킴, 〈유럽인들이여, 가장 성스러운 것들을 지켜내라〉, 2019, Wood, acrylic paint on MDF, paper, silk, transparencies, LED lights, spotlight, contact microphone, amplifier, speakers, screens. Dimensions variable ©루킴
예를 들어, 2019년에 선보인 리서치 기반의 설치 작업 〈유럽인들이여, 가장 성스러운 것들을 지켜내라〉은 19세기 러-일 전쟁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독일 석판화에서 출발한다. 해당
석판화는 동양의 문화적, 인종적 차이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해 유럽인이 러시아와 연대하길 요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석판화의 이미지는 ‘황색 위험(The Yellow Peril)’이라는 표제와 함께 미국과 프랑스 신문에 실리기도 했으며, 2020년 팬데믹 시기에는 동양인 비하 목적으로 해당 문구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루킴, 〈유럽인들이여, 가장 성스러운 것들을 지켜내라〉, 2019, Wood, acrylic paint on MDF, paper, silk, transparencies, LED lights, spotlight, contact microphone, amplifier, speakers, screens. Dimensions variable ©루킴
루킴은 이 석판화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하고, 이를 둘러싼 맥락을 오늘날의
독일과 연결시켰다.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사회주의 국가 간 연대에 의해 독일로 이주한 베트남인들의
역사를 추적하며, 그 안에서 베트남인들이 겪어 온 차별의 역사가 오늘날 독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질문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제기되는 질문은 “누가 어떤 곳에 머무를 ‘권리’를 갖는가?”, “한
개인의 ‘존재’는 무엇을 남기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구성하고 있는가?”였다.
루킴은 이와 같은 질문과 리서치를 바탕으로, 19세기 석판화 원본
이미지의 여러 요소를 물리적인 전시 공간으로 옮겨 재구성했다. 이때 전시 공간 안에서 관객의 몸은 해체의
도구가 되어, 움직임에 따라 이미지를 탈-구성하는 또 다른
작업의 요소로서 작동하게 된다.

루킴, 〈Tax Returns/분청사기상감인화문붕명둔접〉, 2020, Single channel video, sound; ceramics, QR code, 50 ceramic plates offered to visitors. Dimensions variable ©루킴
이듬해 한국으로 이주해 처음으로 선보인 작업 〈Tax Returns/분청사기상감인화문붕명둔접〉(2020)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하며 진행한 지역적, 매체적
리서치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루킴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한 15세기 궁녀의 퀴어성에 대한 기록과
같은 시기에 나온 공납용 자기를 접목했다. 당시 궁녀들이 서로의 몸에 문신하던 ‘벗 붕(朋)’ 자를 엉덩이를
본뜬 접시에 새기고, 공납용 자기와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해 전시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줌으로써
시민이 낸 세금의 일부를 돌려주는 장면을 연출했다.

한편, 2021년 작업에서 루킴은 물과 땅, 두 종류의 다른 숲 등 차별화되는 두 가지의 지질학적 형태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영역인 ‘에코톤’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경계’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다. 그는 특히 서로 다른 두 생물 군계가 맞닿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모서리 효과’에 주목했는데, 이곳에서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주체인 물에 의해 서로 다른 생태계가 연결되며 더 많은 수와 종류의 생물이 융성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루킴은 이러한 에코톤의 개념을 한국 사회에서의 ‘우리’라는 단위로 치환해 재구성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63년부터 2017년까지의 한국 직접 선거 결과 기록을 분석하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나뉜 지역들을 동물의 모습으로 변환해 표현했다.

루킴, 〈눈, 코, 입, 귀, 이마, 턱, 광대뼈, 눈썹〉, 2021, Laser engraving on acrylic, text, Manila rope, acrylic on XPS, microphone, speaker. Dimensions variable ©루킴
이러한 에코톤에 대한 연구와 함께 그의 주된 관심사로 자리하고 있던 것은 비인간 매개체로서의 ‘물’이었다. 대표적으로
2021년 《메디테라니아 19 젊은 예술인 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이기 시작한 ‘눈, 코, 입, 귀, 이마, 턱, 광대뼈, 눈썹’ 시리즈는, 젠더 문화 학자인 아스트리다 니마니스(Astrida Neimanis)의 ‘하이드로페미니즘’ 이론에서 언급된 물의 전략들에 착안하여 제작되었다.
루킴은 하이드로페미니즘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지구 내 생명체들을 연결하는 능동적인 주체로서 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착안하여, 물 자체의 특성으로 인간이 구축한 경계와 폭력의 역사를 해체하고 출구를 찾는 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2021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FACE VALUE – 얼굴을 위한 리허설》에서 루킴은 물이 지닌 성질의 차원에서는 유사성을 띠지만 용도와 역할에
있어서는 상이한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세 가지 상황들을 도피의 개념과 연결하여, 물의 여정을 설치와
텍스트 작품으로 풀어냈다.
여기서 작가는 한강 자살대교 밑의 물, 난민들의 이동이 있는 지중해의
물, 무중력 테라피 탱크의 물을 비인간 매체로서 활성화하여 대본을 만들고 무대처럼 연출함으로써, 물들이 인간이 자신을 사용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만들어낸다.

《FACE VALUE – 얼굴을 위한 리허설》 전시 전경(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2021) ©루킴
루킴은 각각의 물과 인간 사이에서 만들어진 상황들과 역사를 리서치한 다음, 여기서
발견한 요소들을 조각 파편으로 이미지화하고 전시장에 분산 배치하여 물의 무대를 만들었다. 물의 목소리와
‘마음’으로 해석된 사건,
물의 시선으로 본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대본의 형태로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었다.
천장 너머에서 시작해 바닥까지 드리워진 밧줄은 물의 시각적 대체물로서 무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는 물에 젖을수록 더욱 질겨진다고 알려져 있는 마닐라삼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선박에서 사용되어 왔다.

《에코톤: 탈출 역량》 전시 전경(탈영역우정국, 2022) ©루킴
지난 작품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보여주었던 개인전 《에코톤: 탈출 역량》(탈영역우정국, 2022)은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úa)의 치카노 페미니즘 저서 『경계지대/국경』에서
다루는 ‘뱀’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뱀은 ‘여성의 정조를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 ‘물리면 위험해지는 것’이라는 남근상징(Phallic Symbol)을 형성해 왔고, ‘독을 지니고 있는 것’, ‘그것을 침투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책에서 저자 글로리아는 죽은 방울뱀의 피를 마시게 되고, 그날
밤 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꿈을 꾼다.

루킴, 〈뱀(Interpermeations)〉, 2022, 《에코톤: 탈출 역량》 퍼포먼스 전경(탈영역우정국, 2022) ©루킴
여기서 뱀은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등 정체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두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에 착안해, 루킴은 우리 몸이 순환하고 얽혀 있는 지배적 논리에 대한 정치적인 인식을 일으킬 수 있는 뱀의 시공간을 만들고, 이미지, 소리, 퍼포먼스의
시공간적 설치와 장치들을 통해 이분법화 되고 고정된 정체성들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했다.

한편, 2023년부터 선보인 퍼포먼스 시리즈 ‘a fist is a fist is a fist’는 몸의 선단이자 다층적 사회적 함의를 가진 ‘주먹(fist)’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쥔 손의 형태,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 앞에 붙는 수식어의
뉘앙스에 따라 급진적으로 변형되는 주먹의 의미에 주목했다.
퍼포먼스는 다양한 소리의 변주와 함께, 쥐었던 주먹을 펴는 동작, 다시 주먹을 쥐는 행위, 서로의 주먹과 몸이 교차하는 장면들을 통해
‘발화(ignition)’ 즉, 불이 붙는 찰나의 순간의 의미를 표현한다. ‘발화’는 불의 시작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식물의 개화나 특정 문화의 번영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포괄한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퍼포머들의 동작은 의도된 이탈과 교란을 상징한다.

《I KNOW WHAT I’VE DONE》 전시 전경(TINC, 2024) ©루킴
지난해 This is Not a Church(TINC, 구 명성교회)에서 열린 개인전 《I KNOW WHAT I’VE DONE》에서 루킴은
같은 해 6월 이탈리아 레지던시(7th edition CROSS
International Performance Award 2023-2024 - COLLATERALE)에서의 리서치를 바탕으로 한 영상
작업과 신작 조각 및 설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루킴은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역의 오르타 호수와 관련된 한 신화에 주목했다.
성 줄리오(Saint Giulio)라는 인물이 이 지역에 교회 100채를 짓기로 결심하고, 99채를 지은 후 마지막 한 채를 호수의
한 섬에 지으려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그 섬은 ‘뱀의 섬’이라며
말렸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섬으로 건너가 뱀들을 모두 죽이고 마지막 교회를 세운 후 세상을 떠났다.

루킴, 〈I KNOW WHAT I’VE DONE〉, 2024, Single-channel video, sound, color, 4K, 16min 40sec. ©루킴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상 작품 〈I KNOW WHAT I’VE
DONE〉(2024)은 성 줄리오와 뱀이 잠시 되살아나 다시 만나는 모습을 그린다. 영상은 “섬이 만약 혀를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말할까? 뱀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뱀들은 정말로 뱀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시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었던 공간에서 ‘뱀의 섬’에 대한 신화를 조각, 설치 등으로 재구성하여 현재의 맥락으로 끌어들인다. 아울러, 전시는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E. Butler)의 미완성 3부작 『Parable 시리즈』
속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를 참조한다.
우화 속 주인공 로런은 ʻ초공감능력(hyperempathy)’을 가진 채 살아가며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몫과 피부처럼 느낀다. 자신의 피부(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과 존재를 감각하는 주인공의 능력은 전시에서 뱀처럼 사라져야만 했던, 숨어야만 했던
존재들을 상기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루킴, 〈Before the Bite〉, 2024, Performance ©루킴
오늘날 만연한 폭력의 구조를 형성해온 다층적인 역사를 추적해 가며 만들어지는 루킴의 작업은, 식민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외되고 희생되어 온 존재들을 상기시키고,
여전히 그 영향 아래 놓여 있는 이들이 탈주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예술을 탐구해 오고 있다.
이러한 루킴의 작업은 과거부터 이어진 폭력의 역사를 재인식하게 만들고,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한 세계 내 다양한 존재들이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 ‘공의존(co-dependence)’하는, 위계 없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영상, 사진, 사운드, 퍼포먼스, 설치, 텍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이분법과 고정된 정체성을 흔드는 새로운 형식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루킴,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에서 발췌)

루킴 작가 ©아츠액츠데이즈
루킴은 프랑스 그르노블 고등예술대학교에서 순수미술 학사와 석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I KNOW WHAT I’VE DONE》(TINC, 서울, 2024), 《a fist is a fist is a fist》(보안1942, 초이앤초이갤러리, 공간사일삼, 서울, 2023), 《에코톤: 탈출
역량》(탈영역우정국, 서울,
2022)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오프사이트 2: 열한 가지 에피소드》(국제갤러리, 서울, 2025), 《Coalition of Waters》(발틱현대미술관, 우스트카, 폴란드, 2025), 《Enact/In Act》(Millennium Film Archive, 브루클린, 미국, 2024), 《glitch:
new flesh》(Visaural, 뉴욕, 미국, 2023), 《킬타임트래시_임시
killtimetrash_temp》(WESS, 서울,
2023), 코임브라현대미술비엔날레(2022), 《Fascination》(레낭 현대미술센터 (CRAC 알자스),
알트키르쉬, 프랑스, 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루킴은 그로노블 고등예술대학교 레지던시(프랑스, 2025), 발틱현대미술관 레지던시(폴란드, 2025), 제7회 Cross
Award 레지던시(이탈리아, 2024) 등의
입주 작가로 활동한 바 있으며, 이탈리아 2023-2024 제7회 Cross Award – COLLATERALE를 수상했다.
References
- 루킴, Ru Kim (Artist Website)
- 경기도립미술관, [전시] ⟪N ARTIST 2021 : 의심하는 돌멩이의 노래⟫ 루킴
- 비애티튜드, 지금 꿈꾸는 미래의 미래를 품을 수 있는 미래
-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전시 소개] FACE VALUE 얼굴을 위한 리허설 (Artist Residency TEMI, [Exhibition Overview] FACE VALUE)
-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도록] FACE VALUE 얼굴을 위한 리허설 (Artist Residency TEMI, [Catalogue] FACE VALUE)
- 아트선재센터, [리플렛] 오프사이트 2: 열한 가지 에피소드 (Art Sonje Center, [Reflet] off-site 2: Eleven Episodes)
- 탈영역우정국, [서문] 에코톤: 탈출 역량 (Post Territory Ujeongguk, [Preface] Ecotone: Capacity for Escape)
- 프리즈, 프리즈 위크 서울, 도시 전역에서 펼쳐지는 프리즈 라이브 퍼포먼스, 2025.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