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그림(b. 1987)은 불교미술의 전통 기법을 활용해 퀴어를 포함한 다양한 동시대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그의 작업은 불교 서사와 개인 또는 사회적 서사를 결합하거나 또는 분해/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동시대의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모순적 의문을 통해, 작가는 동시대를 구성하는 소수와 다수의 이분법적 개념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박그림, 〈꽃이라도 사 오는 건데〉, 2015, 비단에 담채, 45.5x53cm ©박그림

2015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박그림의 초기 연작 ‘화랑도’는 정교하고 섬세한 전통 기법으로 게이 남성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이상화하여 담아내고 있다. 이 작업의 동기는 외모 콤플렉스에 의한 작가의 자기혐오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소셜미디어 속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남성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자기애를 동경하게 되었고, 이는 곧 그들의 아름다움, 가감 없는 나르시시즘과 에로티시즘을 작품에 담아내는 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를 위해 박그림은 자신이 제일 잘 다룰 수 있는 곱디 고운 비단에 그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작가는 “비단이라는 민감하고 부드러운 재료는 그들의 아름다움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비단에 수십 번 칠하여 발색을 내는 것도 아름다움을 얻기 위한 노력은 그만큼 힘들다는 것과 일맥상통” 하기에 작품의 재료로 선택했다고 설명한다.


박그림, 〈멘타이코를 찢은 남자〉, 2018, 비단에 담채, 45.5x53cm ©박그림

작가는 왕의 어진을 그리는 초상기법이기도 한 고려불화의 기법으로 남성들을 그렸다. 이때 그는 작은 세필을 이용해 얼굴 근육 조직과 살결을 따라 일일이 선과 점을 그림으로써 피부의 질감을 실감 나게 표현하는 육리문법(肉理文法) 기법을 사용한다.
 
비단이라는 소재에 부드러운 곡선과 연하게 채색을 쌓아 올리는 기법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아름다움을 섬세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박그림, 〈심호도 - 낙류〉, 2019, 비단에 담채, 290x145cm ©박그림

‘화랑도’ 연작에서 박그림은 퀴어로서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욕망을 투사하였다면, 2018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심호도 (尋虎圖)’ 연작에서는 불교의 ‘심우도(尋牛圖)‘ 설화를 차용해 자전적인 서사와 결합하여 새로운 퀴어 도상과 알레고리를 직조해 냈다.
 
심우도는 한 소년이 자신의 본성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여기서 소는 깨달음의 매개체로, 소년은 수행자로 비유된다. 그러나 박그림의 그림에서는 소년 대신 호랑이가, 그리고 소 대신 보살이 등장한다.  
 
작가는 대중의 영물로 인식되지만 한국인의 근간인 ‘단군 설화’에서는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를 불완전하고 미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사회가 정한 기준으로부터 빗겨 난 자신의 정체성과 더불어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작가는, 이러한 호랑이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아 작품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박그림, 〈심호도 - 간택〉, 2018, 비단에 채색, 70x92cm ©박그림

2018년작인 〈심호도 - 간택〉에서는 그간 작가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름다운 게이 남성들을 보살로 치환하고, 그 사이에 호랑이로 상징되는 자신을 그려 넣었다. 이 그림 또한 고려 불화의 기법을 따르고 있으며, 눈을 가린다는 의미의 간택의 ‘간(柬)’을 표현하듯 보살 중 한 명은 반투명한 눈가리개를 하고 눈을 감고 있다.
 
두 보살은 LGBTQ+를 상징하는 색상인 무지갯빛 사라(보살이 쓰는 면사포)를 작가를 상징하는 호랑이에게 씌워주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소수 장르인 불교미술을 통해 소수자성을 비롯한 자신의 정체성을 풀어내고자 하는 작가의 작업 여정을 의미하는 도상이라 볼 수 있다.

박그림, 〈심호도 - 일광〉, 2022, 비단에 담채, 250x122cm, 〈심호도 - 월광〉, 2022, 비단에 담채, 250x122cm ©박그림

한편 나란히 쌍을 이루는 작품 〈심호도 - 일광〉(2022)과 〈심호도 - 월광〉(2022)은 두 보살을 각각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로 분하여 양가적인 모습을 가진 모든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도상은 상대의 첫인상에 따라 하나의 이미지로 제한하려는 경향, 즉 인간의 판단 기준에 의한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진다. 


박그림, 〈벨 아미〉, 2020, 비단에 담채, 130x130cm ©박그림

그리고 ‘벨 아미(Bel Ami)’(2020-2021) 연작에서 박그림은 게이 남성들의 집단적 성행위를 순수하게 퀴어적인 차원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작에서는 기존에 자신의 정체성으로서 표현해 온 불교적인 색채를 제거해 기존의 문법에서 탈피하려는 작가의 욕구가 드러난다.
 
박그림은 인스타그램의 인터페이스에서 차용한 정사각형의 프레임에 다양한 체위로 성애를 표출하는 게이 남성들의 누드 군상을 그려 넣었다. 제목인 ‘벨 아미’는 1차적으로 게이 포르노 레이블을 의미하지만, 2차적으로는 모파상의 동명 소설 속 아름다운 외모로 야망을 실현하는 주인공을 뜻하기도 하며, 3차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게이 친구들’을 의미한다. 


박그림, 〈벨 아미_입구〉, 2021, 비단에 담채, 지름 30cm ©박그림

또한 흥미로운 지점은 보살이 쓰는 면사포인 사라가 이 장면 안에서는 성기 등 음부를 가리는 용도로 기능한다. 임근준 비평가는 “이러한 음화(淫畵)의 성화화(聖畵化)를 통해 구현되는 것은, 모종의 미적 숭고였으니, 천박한 욕구를 주고받는 성애적 네트워크로부터 고결한 가치를 찾는, 바꿔 말해, 성과 속의 새로운 조화를 이끌어내려는 시도였다”고 보았다. 


《참: 가장 무도회(CHAM; The Masquerade)》 전시 전경(유아트스페이스, 2021) ©유아트스페이스

2021년 유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개인전 《참: 가장 무도회(CHAM; The Masquerade)》은 ‘벨 아미’ 연작을 비롯해 ‘전통회화의 현대적 적용 및 재창안’이라는 주제로 기존의 작업 방식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통하여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제작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그 중에서, 작가의 페르소나인 호랑이를 주제로 한 작품 〈비호〉(2021)는 작가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개의 화면으로 나누어진 이 작품은 아기 호랑이의 눈을 담은 그림과 반투명한 검은색 사라에 감겨진 호랑이 꼬리를 담은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그림, 〈비호〉, 2021, 비단에 담채, 각 27x110cm, 《참: 가장 무도회(CHAM; The Masquerade)》 전시 전경(유아트스페이스, 2021) ©유아트스페이스

호랑이의 꼬리를 타고 넘는 이 사라의 모습은 제석천의 인드라망(indrajāla, Indra's net)을 차용하여 그려졌다. 인드라망은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인 제석천의 궁전에 드리워진 보석 그물로, 이는 화엄 사상에서 우주 만물의 상호 연관성을 상징하는 개념이다.
 
각 구슬이 서로를 무한히 비추며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인드라망처럼, 그의 작품은 하나의 존재가 여러 존재와 무한히 관계하고 있다는 불가의 가르침을 현대미술의 차원에서 구현하며, 예술로써 모든 존재의 평등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반영한다.  


《虎路(호로), Becoming a Tiger <서울>》 전시 전경(스튜디오 콘크리트, 2022) ©스튜디오 콘크리트

나아가 2022년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열린 개인전  《虎路(호로), Becoming a Tiger <서울>》에서 박그림은 작가로서의 성장기를 총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제목을 이루는 단어 ‘虎路(호로)’는 ‘호랑이의 길’이라는 뜻으로, 이는 박그림이 호랑이를 자신의 미술적 페르소나로 간주함으로써 그 자태의 유형적 미학과 용맹함의 무형적 미학을 통해 자신의 자기혐오를 극복해 나가는 행로를 의미한다.
 
전시는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타인의 우상화 작업을 수행했던 초기에서 점차 작가 본인의 자아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여정을 담으며, 박그림의 자전적 극복과 동시에 작가 박그림으로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준다.


《虎路(호로), Becoming a Tiger <서울>》 전시 전경(스튜디오 콘크리트, 2022) ©스튜디오 콘크리트

전반적인 구성은 ‘심호도’ 연작, 〈무명-사유-삼매〉, 〈반야호〉, 그리고 ‘미미’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각각 환생, 자각, 자애, 그리고 범애를 주제로 한다.
 
즉, ‘심호도’ 연작은 주체-타자의 권력 관계가 지닌 변증법적 서사의 결과로서 작가의 자아가 환생하는 찰나와 역사를, 〈무명-사유-삼매〉는 자신에 대한 큰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이르는 걸음들을, 〈반야호〉는 자신의 인간적 존재성이 지닌 근본적인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와 포용에 따른 자기애의 기반을, 그리고 ‘미미’는 그런 자기애에 기반을 둔 사회적 관계성을 통한 미적 즐거움의 찬양과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


《YES, My 로드 》 전시 전경(THEO, 2022) ©THEO,>

이후 박그림은 동시대에 통용되는 서사와 이미지를 전통적인 표현형식과 결합한 ‘Holy Things’(2022) 연작, 이분법적 서사/인물의 반전을 탐구하며 양가성을 보여주는 ‘흑화연’(2022) 연작을 발표하는 등 작업의 외연을 점차 넓혀 나갔다. 


《사사 四四》 전시 전경(THEO, 2024) ©THEO

그리고 2024년 갤러리 THEO에서 열린 개인전 《사사 四四》는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확인했던 과거 도상들을 재고하는 이들의 겹을 쌓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전시는 개별 작품뿐 아니라 더 먼 과거의 전통과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함께 입체적인 관계 속에서 보게 하고, 무엇이 반복되고 또 변주되고 있는지, 또 어떤 감상과 암시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겹쳐 보게’ 한다.
 
가령 전시에는 작가의 과거 작업들, 그리고 그 작업이 맺고 있는 여러 관계와의 ‘겹쳐짐’을 의도하는 반복하기, 마주보기, 중첩하기의 형식으로써 그간 작가가 시도해온 자기 정체성의 이미지화를 한 번 더 강조한다.

《사사 四四》 전시 전경(THEO, 2024) ©THEO

전시에서 선보인 가장 선명한 자기-의식적 이미지는 ‘심호도’ 연작의 호랑이에서 나타난다. 과거 ‘심호도’ 연작에서 작가는 자신과 동일화된 호랑이를 보살들과의 관계 속에 병치시키곤 했다. 하지만 《사사 四四》에서 그 인물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몇몇 작업은 마치 과거의 작가(호랑이)가 주변 보살들을 없앤 사후의 장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보살들이 사라진 화면 속 호랑이는 주변과의 관계가 아닌 스스로를 살피는,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확인하는 자기-인식의 형식이자 도상이 된다. 가령 〈일극 日劇〉과 〈월극 月劇〉에서, (주로 부처 형상에 그려지는) 신광/두광을 두른 호랑이는 겉과 속의 서로 다른 성질 속에서 참선수행의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박그림, 〈회 回〉, 2024, 비단에 담채, 230x100cm, 《사사 四四》 전시 전경(THEO, 2024) ©THEO

그리고 전시장 중앙에 자리한 상대적으로 큰 사이즈의 〈회 回〉(2024), 〈륜 輪〉(2024)에서 보이는 심우도의 ‘인우구망(人牛俱忘)’ 도상을 닮은 이미지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박그림 작업의 이중성과 복합성을, 그것의 응집성과 확장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박그림, 〈륜 輪〉, 2024, 비단에 담채, 230x100cm, 《사사 四四》 전시 전경(THEO, 2024) ©THEO

이 작품들은 표면적인 현세의 이야기 혹은 소와 목동 간에 벌어진 일—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두 지워버린 채, 심우도의 ‘인우구망(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 빈 원상만을 그린 그림)’처럼, 단순한 자국 외에는 어떤 해석을 위한 단초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극히 단순한 이미지, 배경과 여백은 ‘시작과 끝, 안과 밖, 나와 타자, 과거와 현재, 전통과 새로움’ 등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자기-의식적 장면들을, 구도(求道) 여정의 중첩과 순환을 지지한다.


박그림, 〈아미 我尾〉, 2024, 비단에 담채, 120x40cm ©박그림

또한 자화상 〈아미 我尾〉(2024) 속 박그림의 모습은 벌어진 틈 안에, 심지어는 찢어진 상태 속에 등장한다. 여기서 ‘찢어짐으로의 나타남’은 주변 관계에 의지하는, 또는 자기혐오와 타인을 동경하는 과거의 모습과는 다른 성격의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박그림의 작업은 불교미술의 전통, 퀴어 정체성, 인간관계, 과거의 경험과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직면하는 작가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자전적인 서사를 경유하는 동시에 오늘날 타자와의 관계, 사회의 이분법적 고정관념 등을 다양하게 사고할 수 있는 형식으로 확장되어 나가고 있다.  
 
또한 그는 과거의 전통을 무조건적으로 답습하기는 것이 아닌 이전의 범례와 규칙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탐구하고 재해석한다. 즉 일종의 번안과 갱신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작업은 전통적 소재와 개념을 통해 동시대의 여러 모순을 다시금 사유하고 ‘마주보기’할 것을 제안한다.

 ”불교에서의 평등은 만법의 근본이나 세상 만물의 본성은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 가치를 새롭고 의미있게 전하고 싶다.”   (박그림, 투데이신문 인터뷰 중) 


박그림 작가 ©유아트스페이스

박그림은 불교미술을 도제식으로 수학하고, 동국대학교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사사 四四》(THEO, 서울, 2024), 《虎路(호로), Becoming a Tiger <서울>》(스튜디오 콘크리트, 서울, 2022), 《참: 가장 무도회(CHAM; The Masquerade)》(유아트스페이스, 서울, 2021), 《화랑도》(불일미술관, 서울, 2018)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민화와 K팝아트 특별전 《알고 보면 반할 세계》(경기도미술관, 안산, 2024), 《잘 살고 있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도 하며》(OCI 미술관, 서울, 2024), 《PANORAMA》(송은, 서울, 2023), 《제22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서울, 2022),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일민미술관, 서울, 2022), 《BONY》(뮤지엄헤드, 서울, 2021), 《flags》(두산갤러리, 뉴욕, 201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박그림은 2022년 제22회 송은미술대상 본선, 2018년 엡솔루트 보드카 아티스트 어워드 위너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선프라이드 파운데이션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