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현대미술관이 개관 이래 처음으로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전시를 개최했다.《열 개의 눈》이라는 제목은 열 손가락이 또 하나의 눈이 되어 세상을 감각한다는 은유에서 출발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세계를, 손끝과 귀, 피부와 기억을 통해 다시 바라보게 한다는 의미다.

부산현대미술관이 처음 선보인 배리어프리 전시《열 개의 눈》에 설치된 김덕희 작가의 <밤의 노래>와<하얀 목소리>. 온도를 통해 감각(촉각)을 깨워주는 작품이다. /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장애인을 위한 전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감하고 교류할 수 있는지를 예술적 언어로 풀어내는 장이라 할 수 있다.
 


배리어프리, 동시대 예술의 새로운 화두

배리어프리는 원래 고령자·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없애자는 사회운동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에서의 배리어프리는 단순한 접근성 보장을 넘어, 동시대 미술이 지향하는 ‘포용’과 ‘공존’의 가치를 담아내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열 개의 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가 크다. 관람객은 전시장 안에서 시각을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촉각을 통해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청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그리며, 기억과 감정을 통해 타인의 경험과 연결된다. 이 과정은 미술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대상이 아니라, 감각과 감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다르게 살아가는 존재들과 교류하는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20명의 작가, 70여 점의 작품이 열어가는 감각의 확장

이번 전시에는 국내외 장애·비장애 예술가 20명이 참여해 총 7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참여 작가들은 자신이 가진 감각적 한계와 조건을 작품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오히려 그 제한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전시안내 브로셔 중 한 페이지(부분) / 사진: 부산현대미술관 웹사이트 캡처화면

김덕희의 대형 설치작품 〈밤의 노래〉와 〈하얀 목소리〉는 파라핀으로 만든 손의 형상과 온도 변화를 통해 ‘차갑지만 따뜻한’ 촉각적 교감을 일깨운다. 손을 잡았을 때 전해지는 미묘한 온도 차이는, 작품이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생명과 교감의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미니멀 아트의 거장 로버트 모리스의 〈블라인드 타임〉은 눈을 가린 채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형상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보지 않고도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을 실험한다. 시각의 부재는 곧 다른 감각의 확장을 가능케 한다.

라움콘의 〈한손 프로젝트〉.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라움콘(송지은)의〈한 손 프로젝트〉는 뇌출혈 이후 불편해진 신체에 맞춰 만든 도구들을 예술화한 작업이다. 숟가락, 집게와 같은 일상적 사물들이 신체와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조형적 오브제로 탈바꿈한다. 제약은 한계가 아니라 또 다른 창조의 시작점임을 증명한다.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 작가의 〈가족 아카이브〉.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시각을 잃은 이후 조각과 회화로 새로운 감각 체계를 구축한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의 〈가족 아카이브〉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만지고 느끼게 하며, 기억과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을 탐구한다.


사라토리 겐지와 정연두의 콜라보 작품의 감상에 대한 안내 브로셔 (부분) / 사진: 부산현대미술관 웹사이트 캡처화면

일본 시각장애 사진가 시라토리 겐지의 초점 흐린 사진과 한국 작가 정연두의 재즈 음악이 결합된〈와일드 구스 체이스〉는 시각과 청각의 어긋남이 만들어내는 감각적 긴장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정상적 감각 체계’의 경계를 흔든다.
 
이외에도 엄정순의〈당신의 눈동자를 위하여〉, 김채린의〈하나인 27가지 목소리〉 등은 시각·촉각·청각을 교차시키며 관람자가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공동체와의 협업으로 태어난 작품들

이번 전시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공동체적 제작 과정에 있다. 전시는 지난해 미술관이 장애·비장애 커뮤니티와 함께 진행한 여섯 개의 프로젝트를 토대로 기획되었다.
 
그중 홍보미의 〈천천히, 가까이〉는 부산맹학교 저시력 학생들과 협업해 제작한 화집으로, 시각장애인의 미술관 방문 경험을 만화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 작품은 예술이 단순히 미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 교류와 연대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전시장 내에 마련된 ‘감각 스테이션’에서는 작품의 미니어처를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으며, 지하 1층 ‘을숙극장’에서는 배리어프리를 주제로 한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이는 전시를 단순한 관람 경험이 아닌, 다층적인 학습과 공감의 과정으로 확장시킨다.


 
포용과 교류의 예술, 동시대적 의미

《열 개의 눈》은 ‘누구나 예술을 경험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넘어, 예술이 인간의 감각과 인식을 확장시키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제안한다. 이는 동시대 미술의 중요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예술은 단순히 시각적 대상의 감상을 넘어, 사회적 차이와 신체적 조건의 경계를 허물고, 타인의 삶을 감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언어가 되고 있다. 《열 개의 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의 본질적 질문을 다시 묻는다.


 
전시 정보
전시명:《열 개의 눈》
기간: 2025년 9월 7일까지
장소: 부산현대미술관
입장: 무료
부대행사: 을숙극장 영화·다큐 상영 (세부 정보는 미술관 홈페이지 참조)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