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생인 김태리와 전인으로 구성된 시각예술 콜렉티브 야광은
고착된 정체성 개념을 전복하는 재현의 언어를 영상, 조각, 퍼포먼스,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경유하여 드러낸다. 야광이라는 팀명이 시사하는
것처럼, 두 작가는 어두운 밤, 흡수한 빛을 뿜어내며 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야광물체와 같이 낯설고 이형적이라고 여겨지는 존재들에 빛을 비추고 발화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윤활유》 전시 전경(윈드밀, 2022) ©윈드밀
야광은 2021년 퍼포먼스 작업인 〈윤활유〉를 계기로 결성되었다. 이와 동명의 이름으로 개최된 첫 개인전 《윤활유》(윈드밀, 2022)에서 야광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급진적 시도를 통해 젠더의 고정된 시각성과 개념을 배반하고, 동시대의 불화하는 타임라인에 응답하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전시 《윤활유》는 퀴어, 특히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췄다. 전시에서 야광은 자신들의 세대의 퀴어(레즈비언)들이 공유하고 있는 하위문화 속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시각적 요소를 가상의 내러티브와 만나게 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인터뷰 및 영상 작업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동시 송출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윤활유》 전시 전경(윈드밀, 2022) ©윈드밀
이 일련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대상은 러시아 여성 듀오 밴드 t.A.T.u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레즈비언 컨셉으로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그룹이었으나, 그룹원인 레나와 율리아의 레즈비언 컨셉에 대한 폭력적 기획 상황에 대한 폭로로 인해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A.T.u는 현재까지 SNS의 수많은 팬 계정과 같은 마니아 층을 소유하고 있다.

《윤활유》 전시 전경(윈드밀, 2022) ©윈드밀
야광은 여러 논란이나 진실공방과 별개로 형성된 t.A.T.u에 대한
공통 기억이 90년대생 퀴어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관통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변을 기반으로 한 페이크(fake) 인터뷰 영상 〈Lantern〉을 제작했다.
영상 속에는 전형적인 레즈비언 캐릭터를 연기하는 총 12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과장된 분장을 한 채 하나의 질문에 엇갈리는 답변들을 털어놓는다. 〈Lantern〉은 t.A.T.u라는
그룹을 매개체로 삼아 누군가에 대해 그 누구도 그의 삶의 속도를 포착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활유》 전시 전경(윈드밀, 2022) ©윈드밀
그리고 인터뷰 영상 옆에서는 실제로 클럽에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제작한 영상 작업 〈LATE(X)〉가 상영되었으며, 전시장에서는 이 둘을 아우르는 동시
송출 퍼포먼스 〈Lick my heart〉가 펼쳐졌다. 퍼포먼스는
전시장을 마치 레즈비언 클럽처럼 변모시켰다. DJ의 음악을 시작으로 다양한 의상과 분장을 한 퍼포머
10여 명이 각자만의 레즈비언적 코드를 연기하며 전시장을 활보했다.
한편 전형적인 TV 토크쇼의 구도를 따른 방송 퍼포먼스에서는 현실의
미디어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레즈비언의 삶과 그들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가 발화되는 현장을 연출했다.

《윤활유》 전시 전경(윈드밀, 2022) ©윈드밀
전시 서문에 적혀 있는 “퀴어, 특히
레즈비언이 서로에게 공감하고, 서로가 있음을 확인하며, 공감과
확인에 의한 수치심을 통해 환희를 느끼고, 시각적 포만을 전달하는 전시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말처럼, 이러한 야광의 작업은 퀴어 중에서 비교적 가시화되지 못했던
레즈비언의 삶과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조명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카인드 : KIND》 전시 전경(PS Center, 2024) ©PS Center
한편 근작에서는 보통의 범주에서 이탈한 존재나 잉여의 표상을 은유한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B급 영화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영상과 퍼포먼스, 그리고 야광의 시그니처인
라텍스 소재의 설치 작업을 통해 가공된 내러티브를 재현하고 있다.

《카인드 : KIND》 전시 전경(PS Center, 2024) ©PS Center
예를 들어, 2024년 PS
Center에서 열린 야광의 두 번째 개인전 《카인드 : KIND》에서는 영상 속 캐릭터의
소품이나 설치물을 실제 공간인 전시장에 설치하며 가상의 내러티브를 현실의 시공간으로 확장시키는 시도를 보였다.
전시는 영상 작업 〈침입자〉와 함께 그 배경을 재현한 설치 작업과 동시 송출 퍼포먼스로 구성되었다. 퍼포먼스 〈날것의 증거〉는 영상 속 ‘침입자’에 대한 ‘날것의 증거’로서
펼쳐졌다.

야광, 〈날것의 증거〉, 2024, 퍼포먼스 ©야광
퍼포먼스는 곤충 껍데기의 질감을 지닌 포유류의 모습을 본 딴 가면을 쓴 퍼포머들이 줄을 지어 전시장으로 입장하며
시작되었다. 퍼포머 중 한 명은 마치 연출자처럼 현재 상황을 중계하고 지시하는 역할을 하며, 다른 퍼포머들로 하여금 영상 작업 안에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현장에서 실제로 촬영하는 것처럼 동시다발적적으로
수행하게 만든다.
이들은 각각 과장된 복장을 입은 채 비닐 막으로 가려진 레슬링 경기장 위로 올라 서로를 공격하거나, 그 모습을 촬영을 하거나, 부항을 혹처럼 달고 다니는 등 비일상적인
행위들을 반복한다. 돌연변이 또는 이형(異形)의 껍데기를 쓴 채 기묘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이들의 모습은 현실의 시공간에 균열을 내는 침입자가 된다.

《카인드 : KIND》 전시 전경(PS Center, 2024) ©PS Center
야광의 이러한 작업은 하나의 단일한 시공간이 흐르는 일상적 공간에 다중적인 정체성과 그에 따른 이질적인 시공간을
켜켜이 중첩시킨다. 야광은 단선적인 일상의 흐름 안에 이형적이고 퀴어적인 시공간을 끼워 놓음으로써 “새로운 다공적인 타임라인을 형성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야광, 〈방문자〉, 2023, 단채널 영상, HD, 컬러, 사운드, 5분 44초 / 〈방문자(2023)를 위한 조각〉, 2025, 라텍스, 체인, 스터드, 레이스, 143x223x150cm, 《가난한 자들》 전시 전경(뮤지엄헤드, 2025) ©뮤지엄헤드
나아가 야광은 2025년 뮤지엄헤드에서 열린 단체전 《가난한 자들》에서
성 정체성과 계급 정체성의 기호가 기묘하게 얽히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 중, 라텍스 소재가 가진 물성을 이용한 조각 작업 〈방문자(2023)를 위한 조각〉은 2023년 10월 27일 단 12시간
동안 홍대앞 미성장 모텔을 빌려 열린 전시 《모텔전》에서 처음 선보였던 작업으로, 성 노동, 임시거처, 값싼 잠자리 등 ‘모텔’의 장소성을 환기하던 전시의 맥락을 함축하며 뮤지엄헤드 공간에 새로이 재연되었다.

침대 프레임을 감싸고 있는 라텍스 조각이 특징적인 이 작업은 소재의 특성상 암모니아 냄새를 풍기며 점차 부식된
흔적을 담고 있다. 무겁게 찌들어 있는 화려한 조각 안에는 여러 곳에서 수집하고 캐스트한 이미지가 숨어
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부식되는 라텍스 표면에 의해 이미지는 점차 변형된다.

야광, 〈방문자〉, 2023, 단채널 영상, HD, 컬러, 사운드, 5분 44초, 《가난한 자들》 전시 전경(뮤지엄헤드, 2025) ©뮤지엄헤드
한편 침대 머리맡에서는 영상 〈방문자〉(2023)가 루프된다. 짧은 흑백 영상에는 세입자가 놓은 쥐약을 먹고도 살아남은 돌연변이 쥐가 집을 점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장면이
펼쳐진다. 약물 남용으로 인한 신체/성기 변형이 지시하는
퀴어 신체성, 덫에도 걸리지 않는 쥐가 상징하는 무단 침입자 또는 점거인의 위상은 야광 작업 전반에
흐르는 교차적 정체성을 확인시킨다.
아울러, 야광은 영상의 한 복판에,
그리고 다른 퍼포먼스의 구석구석에 메이드 복장의 걸레질을 하는 여자를 등장시키는데, 이때
코스튬 플레이의 섹슈얼한 인상 외에 두드러지는 것은 실제로 클럽, 집,
전시장 및 각종 현장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누군가의 재생산 노동의 그림자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에 참여한 야광은 신작 〈다크 라이드〉(2025)를 통해 공포에
대한 감각을 대상화하는 대신 이와 연결되어 있는 일상의 이야기를 발화하고자 하였다. 월미도에 위치한
테마파크의 ‘귀신의 집’과 같은 공포 체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상은 공포 체험을 제공하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야광은 ‘공포’라는 것이
얼마나 대상화된 감각인지 그리고 대상화를 당한 객체는 반대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자 테마파크 노동자들에 초점을 맞춰 영상을 제작하고, 이와 연결된 설치 작업을 전시 공간에 구현했다. 이로써 영상은 관객이
경험하는 다크 라이드의 동선과 테마파크 노동자의 일상 모두에 현실의 공포 조건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영상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캐릭터를 통해 젠더, 노동, 돌봄에 대한 사회 전반의 다층적인 담론을 교차시킨다.

이처럼 야광은 신체와 공간을 매개로 인권, 세대, 노동 등의 담론과 젠더에 대한 교차적 관점을 제공하는 작업들을 선보여 왔다.
이들은 하나의 공통적이면서도 일시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을 통해 ‘정상성’에 맞추어 작동하는 현실의 시공간 안에 다양하고 이형적인 타임라인을 만듦으로써 이질적인 에너지가 서로 충돌하고
연결되는 모습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야광의 작업은 사회가 정한 틀에서 빗겨 난 수많은 퀴어적인 존재들의 다양한 정체성과 에너지를 포용하기
위한 예술적 실험이자 실천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어떠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그 아래 요건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 대한 멸시가 가득한 세상에서, ‘퀴어함’이라는 것은 결국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야광,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 작가인터뷰 중)

작가 야광 ©국립현대미술관
2021년 결성된 야광은 김태리(b.
1993)와 전인(b. 1995)로 이루어진 시각예술 콜렉티브이다. 개인전으로는 《카인드 : KIND》(PS Center, 서울, 2024), 《윤활유》(윈드밀, 서울, 2022)가
있다.
또한 이들은 《미니버스, 오르트 구름, ㄷ떨:안녕인사》(아르코미술관, 서울, 2025),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5), 《가난한 자들》(뮤지엄헤드, 서울, 2025), 2024년
아르코미술관 × 온큐레이팅 협력 주제기획전 《인투 더 리듬: 스코어로부터
접촉지대로》(아르코미술관, 서울, 2024), 《모텔전》(미성장 모텔, 서울, 202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References
- 국립현대미술관, 작가인터뷰 | 야광 |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 (National Musue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ARTIST INTERVIEW | Yagwang | Young Korean Artists 2025: Here and Now)
- 윈드밀, [서문] 윤활유 (Windmill, [Preface] Lubricant)
- 하루에 하나, 흡수한 빛을 뿜어낼 때 증폭되는 레즈비언의 기쁨
- 서울문화재단, 김세연 - 방문자, 침입자, 목격자. 야광 개인전 《카인드 : Kind》 퍼포먼스 <날것의 증거(Raw Proof)>
- 뮤지엄헤드, [서문] 가난한 자들 (Museumhead, [Preface] The Poor)
- 국립현대미술관, [리플렛]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 (National Musue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Refleat] Young Korean Artists 2025: Here and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