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호주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의 전시는 하루 5,000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으며 두 달 만에 50만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론 뮤익' 전시를 관람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론 뮤익' 전시에 작가의 대표작인 <침대에서>가 전시되어 있다. / 사진 : MMCA

이 전시는 개막 20일 만에 누적 10만 명을 돌파하며, 평일 약 4,200명, 주말에는 평균 7,400명, 하루 평균 5,000명 이상의 관람객을 기록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공공미술관의 블록버스터화
 
이 전시는 MMCA와 프랑스 카르티에 재단의 공동 기획이지만 대부분 카르티에가 주도한 블록버스터 성격이 강하다. 미술관 전시의 블록버스터화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Camp: Notes on Fashion》처럼,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 역시 대중의 흥미와 소비 욕구에 부응하는 대형 전시를 통해 관람객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문화 소비의 대중화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미술관 본래의 비판적, 실험적 역할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낳고 있다.


<캠프: 패션에 대한 노트>(Camp: Notes on Fashion ) 전시의 다채로운 의상 디스플레이 / 사진: 위키피디아

오늘날 공공미술관은 대중성과 관람객 확대, 수익 창출이라는 외형적 성과를 보여주지만, 근본적으로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순수미술’이라는 비가시적 영역을 공공의 자원으로 지원하고, 국가가 이를 보장하고 하는가?
 
그 이유는 명확하다. 순수미술은 기초학문이나 기초과학처럼 인간 정신의 깊은 층위와 창의성을 탐구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반도체가 없으면 AI가 없듯이 예술과 철학은 사회와 인간 정신의 반도체이다. 정신적 토양이 메마른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한 발전과 창조를 이룰 수 없다.
 
이러한 토양이 없으면 사회는 피상적 소비와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게 되며, 정신적 황폐화로 나아간다. 한국은 거대한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순수미술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성숙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블록버스터 전시는 미술관의 입장에서 자본과 성과의 달콤한 유혹이라 단기적으로는 유효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미술관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훼손하게 되며 결국 미술관은 대중의 입맛을 좇는 ‘문화상품’의 유통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구겐하임 빌바오: 균형의 성공적 모델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 사진:빌바오 구겐하임

스페인의 구겐하임 빌바오는 공공미술관이 대중성과 예술성, 시장성과 공공성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평가받는다. 1997년 프랭크 게리의 독창적인 건축물로 개관한 이 미술관은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로 불리며 도시 재생과 경제 활성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구겐하임 빌바오의 진정한 성공은 건축적 상징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문화적 가치와 비평적 실천을 통해 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한 데에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이 미술관은 7억 62백만 유로의 경제적 파급 효과를 기록했으며, 2024년에도 130만 명 이상의 방문객과 7억 77백만 유로의 수요를 창출하며 지역 경제와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당시 관장이었던 후안 이그나시오 비다르테는 “건축은 필수 요소이지만, 기획과 내용, 시스템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미술관 운영에서 전시 기획력과 지속성, 콘텐츠의 깊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했다.
 
구겐하임 빌바오는 이후에도 단발적인 쇼와 흥행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이고 비판적인 전시, 신진 작가 발굴, 지역 커뮤니티와의 긴밀한 협업, 환경 지속성과 사회적 책임 실현 등 다양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균형 전략은 미술관을 일회성 소비 공간이 아닌, 사회적 가치와 창의성, 공동체적 연대를 실현하는 진정한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순수미술은 자본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 정신의 자유와 상상력의 산물이다.
 
장 보들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물질의 소비를 넘어 기호와 상징의 소비로 나아가며, 인간의 삶과 욕망마저 소비의 논리로 조직된다고 비판했다. 오늘날 많은 미술관은 관객의 체험과 인증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이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지적한 ‘공론장의 변형’과도 맞닿아 있다. 미술관은 본래 사회적 비판과 성찰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자본의 논리에 포획되어 점차 소비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산업이 모든 문화를 획일화하고 표준화함으로써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자율성을 마비시킨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오늘날 문화는 모든 것을 동일성으로 감염시킨다. 영화, 라디오, 잡지들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며, 각각의 영역은 자기 안에서 통일되어 있고 서로 간에도 통일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문화산업이 오락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인간을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킨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공공미술관은 흥행성과 대중성에 휘둘리지 않고, 비평적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큐레이터들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동시대성을 반영한 독창적인 전시와 다양한 해석의 장을 마련해야 하며, 심포지엄, 아티스트 토크, 커뮤니티 프로그램 등을 활성화해 대중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공공미술관의 본질은 대중성과 예술성, 시장성과 공공성 사이의 균형에 있다. 흥행과 수익에만 매몰될 경우 미술관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며, 사회적 비판과 시대정신의 장으로서의 역할도 잃게 된다. 대형 전시는 이러한 균형 속에서 보완적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순수예술에 대한 공공의 투자는 단기적 수익이 아닌 사회의 정신적 토양과 문화적 품격을 키우기 위한 장기적 투자다. 문화 없는 국가는 방향을 잃고, 사회는 비판과 창조의 힘을 상실한다. 순수미술은 사회의 존엄성과 지속성을 지탱하는 마지막 방파제다.
 
결론적으로, 공공미술관은 자본주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 정신의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문화의 지속 가능성을 수호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공공미술관이 지향해야 할 본질적 가치이다.

References
  • 아도르노, T. W., & 호르크하이머, M. (2002). 『계몽의 변증법』. 스탠포드대학교출판부. (초판 1944))
  • 보들리야르, J. (1998). 『소비의 사회: 신화와 구조』. 세이지출판사. (초판 1970)
  • 하버마스, J. (1989). 『공론장의 구조변동: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대한 탐구』. MIT프레스. (초판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