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노식(b. 1989)은 신체를 통해 바라보고 느끼고 포착한 순간들을
캔버스 위로 옮겨내는 작업을 한다. 작가는 작업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자신의 지리적 이력이라고
말한다. 그의 회화는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장소를 포함해 사적인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일상적인 공간들을
되짚어 내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임노식, 〈Feed dispenser〉,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193x132cmx2pcs ©임노식
임노식의 첫 번째 개인전 《안에서 본 풍경》(OCI 미술관, 2016)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은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공간인 목장과 축사를 배경으로 한다. 그의 작업은 사적인 경험이 담긴 장소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관찰하는 일에서 출발해 과거의 기억을 중첩시키며
공간 자체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되새기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한 그의 회화는 사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의 풍경을 담아낸다. 단순히
자연의 풍경을 재현하는 일에서 나아가 그의 회화에는 작가 내면의 심리적인 풍경과 기억에 내재된 감각의 흔적들을 끄집어 내어 캔버스 표면 위로 켜켜이
쌓아낸 시간의 지층들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안에서 본 풍경’(2016)
연작은 평범한 목장을 재현한 듯 하지만 그가 현실을 투영한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 목장을 바라보게 된 중요한 계기를 고백하듯 담아낸
작업이다.
작가는 몇 년 전 가축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설치한 일정량의 전류가 흐르는 구조물 밖으로 목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젖소 한 마리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엄동설한의 낯선 세상을 마주한 끝에 결국 다시 스스로
목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임노식, 〈Milking room 3〉, 2016, 캔버스에 유채, 97x145cm ©임노식
이로부터 작가는 목장의 역할과 기능 안에서 정해진 틀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소들의 삶은 외부에 의해 통제된 사회로부터
일탈을 꿈꾸지만 결코 사회를 떠날 수 없는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황정인 큐레이터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 연작은 “단순히 울타리라는 물리적
공간 구획이 만들어낸 안과 밖의 풍경의 모습을 그린 것을 넘어, 눈앞에 닥친 현실과 그에 반하는 이상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뒤엎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갈등하는 내면의 심리와 이를 통해 바라본 세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임노식은 그의 두 번째 개인전 《접힌 시간》(합정지구, 2017)에서 고향인 여주의 목장에 얽힌 기억의 풍경이 아닌 당시 그가 생활하고 있던 문래동의 주변 풍경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작가는 매일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에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주변 풍경들을 바라보거나, 같은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관찰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특정한 시공간에 반복적으로 위치시키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시공간에
길들여진 지각의 틈새를 비집고 침투하는 보이지 않는 차이들을 몸을 통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임노식은
스스로 “시공간적 존재”로서 위치시키며 경험한 몸의 감각들과
그로 인해 재인식되는 지각의 작은 홈들을 캔버스 위로 구체화했다.

예를 들어, 〈Sky Tower〉(2017)는 쓰고 남은 자투리 캔버스 천을 모아서 같은 크기로 자른 뒤, 매일 보았던 밤하늘의 모습을 되새기며 그 잔상을 하나씩 그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작업이다. 같은 자리에 켜켜이 쌓아 올린 100여 장의 작은 그림들로 이루어진 이 다층적인 구조는, 매일 “같은 바닥, 같은 시간, 같은 풍경”을 오가며 축적된 접힌 시간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임노식의 작업에 대해 안소연 미술비평가는 “바로 그 시공간에 대한 지각의 경험과 사유를 통해, 일상의 풍경에 저항하는, 바로 어제와 다른 풍경을 구축하려 한다”며, “접힌 시간처럼 혼돈을 품고 있는 이 밤 풍경들에는, 현실의 시공간이 더 이상 현실의 그것이 아닌 존재로 다르게 지각된다”고 보았다.

《물수제비(Pebble Skipping)》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0) ©임노식
이어서 임노식은 세 번째 개인전 《물수제비(Pebble Skipping)》(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0)에서 회화의 구동 방식에 대해 되새겨보며
작업한 회화 작품들을 선보였다. 당시의 작업은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로서 무언가를 ‘눈에 담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을 회화의 언어로 되새겨보는 일에서 출발했다.
그는 ‘담다’라는 표현에서
모래를 담아 올리는 장면을 떠올렸다. 모래를 손으로 잡아 담을 때 모든 알맹이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몇 알 씩 떨어지게 되는 것처럼, 회화 작업 또한 야외에서 작가가 본 풍경이 작업실 안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중간에 누락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임노식은 여기서 모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서 거리가 멀어져 그 형태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캔버스 직조 사이사이로
풍경은 잃어버릴 수 있지만, 되려 그들의 잔존이 캔버스에 남겨지는 것이 아닐지 탐구하며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전시의 제목인 “물수제비”는
납작한 조약돌을 수면 위에 던져 얼마나 많이 수면 위를 튀기는지 보는 놀이이다. 조약돌이 수면 위로
남긴 궤적들을 바라보는 이 행위처럼 그의 개인전 또한 풍경-작업실-전시장의
궤적이 뒤섞인 채 공명하는 잔상을 남긴다.

《물수제비(Pebble Skipping)》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0) ©임노식
임노식은 세 공간의 흐름이 어떻게 캔버스에 담기는지에 이어, 이것이
어떻게 전시장에서 보여질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는 사각형의 회화 프레임을 유지하되 이 사각형이 공간과
어떻게 마주하고, 전시장 내에서 회화 자체가 공간이 될 수 있는지 질문하며 일반적인 회화 설치 방식에서
벗어난 전시를 구상했다.
그 결과 그의 회화는 호를 그리거나 벽이나 기둥 같은 형태로 존립하게 된다. 이로써
일반적으로 화이트 큐브의 공간적 요소로 간주되었던 창문과 천장의 보, 그리고 전시장 입구도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동하게 된다.

2023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 《긴 이야기》에서
임노식은 스스로에게 그림의 본질과 태도를 되묻고 매체를 고민해 온 시간, 그리고 수집해 온 소재, 장소, 사건 등을 돌이켜 보며 이것들이 과연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질문하며 자기 작업에 대한 ‘긴 이야기’를
펼쳐냈다.
작가는 6개월 동안 빈 캔버스 25개를
펼쳐놓고, 화면 전체를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단계적으로 쌓아 올리는 수행의 과정을 실행했다. 얇은 물감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이는 동안, 그는 지금까지 이어진
개인적인 서사와 감정들이 이 안에 봉합되는 것을 목도했다. 더 나아가 비가시적인 요소를 파편화된 시각적
재현의 영역으로 구축해가며, 화면에 모인 각각의 모티프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또 하나의 서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긴 이야기》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3) ©임노식
임노식은 25개의 동일한 크기의 작품이 공간에 펼쳐지며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전시 풍경을 의도했다. 그리고 보는 이가 상상하고 느끼는 것에 따라 모두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열린 상황을 설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보는 이의 생각과 태도를 담아 낼 수 있는 여백과
쉼을 남겨 두고자 했다.
그의 그림에는 여러 시공간의 이야기가 뒤섞인 불분명한 기억의 수집물들의 경계가 멀겋게 희석되어 드러난다. 이러한 모호하고 불명확한 그림들은 서로를 잇는 어렴풋한 연결고리를 내포하며 전체를 이룬다.

《긴 이야기》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3) ©임노식
그리고 작품들은 작업실에서 순서 없이 진행되었던 제작 과정처럼, 전시장에 옮겨진 순서대로 직사각형의 네 벽면에 같은 간격으로 설치되었다. 이는 이야기의 흐름, 작가의 의도, 회화적 개념, 조형적 효과, 관객의 시선 등 가능한 주관적 감각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무작위로 배열된 작품들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루도록 연출하기 위함이었다.

임노식, 〈작업실 16〉, 2023, 캔버스에 유채, 200x130cm ©임노식
보이는 형상을 희뿌옇게 누그러뜨리는 최근의 작업 방식은 대상과 자기 자신 사이 시공간적 거리의 부피를 시각화
하는 것으로, 이는 곧 수많은 시간과 감정이 켜켜이 중첩된 불분명한 감각의 존재를 은유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경계가 모호한 형상과 희뿌연 화면은 동양화를 전공했던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먹이 종이에 스며드는 자연스러운 색감의 번짐과 일정 시간 동안 물을 머금는
성질 등을 일반적인 서양화 매체로 옮겨 내며, 마치 캔버스 화면에 색이 스며들어 그 빛을 자체적으로
발하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 낸다. 이는 비가시적인 시간과 공간의 틈에서 인식되는 시각적 경험을 유도하고
아련하고 신비로운 감각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2025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개인전 《선산》에서 임노식은
가족묘가 형성되어 있는 선산을 배경으로 개인적인 경험과 문화적인 배경, 그리고 농사 및 장례 등 부족
문화를 둘러싼 작가의 시선을 드러냈다. 작가 특유의 몽환적인 이미지로 재구성된 서사는 긴 시간 계승되어온
전통과 현존하는 환경, 그리고 그 실천의 모습이 동시대 속에서 기호화된 인식체계로서 드러나고 있는 현상을
반영한다.
임노식의 화면 속에서의 벼농사를 짓는 아버지, 형과 일꾼들, 산새를 따라 어우러진 들꽃, 긴 세월을 버티며 자라온 나무, 그늘을 만들어주는 구름을 품은 하늘, 묘를 다듬는 모습 등은 서정적인
풍경화의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본인이 경험한 시골 풍경, 장례문화, 지리, 전설, 가족의
기억들이 중첩된 시각적 기록이자 새로운 시각적 언어로 변형된 결과물이다.

작가는 선산에서 바라본 풍경을 출발점으로 하여 직접 사생하고 촬영한 이미지들을 조합한 다음, 원경과 근경의 구분을 배제한 독특한 시점을 구성했다. 그리고 유채
물감으로 묘사한 풍경을 다시금 오일 파스텔로 뭉개어 대상을 지우는 동시에, 그 대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 역시 지워내고자 했다.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임노식은 오롯이 자신을 둘러싼 공간만이 남는, 섬세하고
미묘한 풍경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그의 그림에서 선명했던 이미지는 그 형태가 흐려지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결국엔 인식 가능한 기호처럼 남겨지게 된다.

수차례 덧쓰인 기억처럼 희뿌연 임노식의 회화는 수많은 시간과 감정이 중첩되어 있는 입체적인 장소가 된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대상들은 그 공간 안에서 겹쳐지고 엉키고 모호한 흔적처럼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 임노식은 시간이 지나며 흐려진 기억의 이미지를 화면에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깃든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렇게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견해내고자
한다.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에 속하고, 누구의 장소라고 정의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곳에서 태어나고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는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할 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이다. 나의 지리적 이력은 분명 작품의 외적인 의미에 영향을 미친다. 이
지리적 이력을 이루는 공간과 주변 환경은 시간과 상호 교차되면서 조금 더 깊고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변하게 된다.” (임노식, 작가노트)

임노식 작가 ©퍼블릭 아트
임노식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에서 예술전문사를 취득했다. 그의 개인전으로는 《선산》(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5), 《그림자가 머무는 곳》(스페이스애프터, 서울, 2024),
《깊은 선》(금호미술관, 서울, 2023), 《긴 이야기》(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3), 《물수제비》(아트스페이스
보안2, 서울, 2020), 《접힌 시간》(합정지구, 서울, 2017)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아라리오갤러리 상해(상해, 중국, 2025),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울, 2024), 송은(서울, 2023), 일민미술관(서울,
2023), 아트센터 화이트블럭(파주, 한국, 2022), 금천예술공장(서울,
2021), 아마도예술공간(서울, 2020) 등의
기관이 연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금호미술관의 《금호영아티스트 2022》에 선정되어 주목 받았다.
임노식은 2019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20년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플랫폼, 2021년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하여 작업하였다.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일민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등 다수의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References
- 임노식, Nosik Lim (Artist Website)
- 아라리오갤러리, 임노식 (Arario Gallery, Nosik Lim)
- 인천문화통신 3.0, 임노식 (IFAC News 3.0, Nosik Lim)
- OCI 미술관, [서문] 안에서 본 풍경 (OCI Museum of Art, [Preface] View from the Inside)
- 합정지구, [서문] 접힌 시간 (Hapjungjigu, [Preface] Folded Time)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문] 긴 이야기 (Project Space Sarubia, [Preface] Unfolded)
- 아트스페이스 보안, [서문] 물수제비 (Artspace Boan, [Preface] Pebble Skipping)
-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문] 선산 (Space Willing N Dealing, [Preface] SeonSan: My Family’s Ancestral Mount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