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준(b. 1988)의 작업은 도심 속을 걷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길을 걸으며 평범한 일상 풍경을 이루고 있는 균형, 비례, 색채를 민감하게 살피고, 그것으로부터 회화의 소재를 찾는다. 작가는 마치 산책자처럼 도시를 배회하며 수집한 풍경에서 추출한 추상적 이미지들을 회화로 옮겨 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희준, 〈Interior nor Exterior – Oil Drawing no.1-12〉, 2015, 종이에 유채, 각 32.5x25cm ©이희준

이희준은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마주한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특히 그는 도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축물과 거리 풍경에 주목했다. ‘옐로우 신’(2010-2012) 시리즈와 같은 초기작에서는 도심 속 건축적 환경을 구상회화의 언어로써 담아냈다.

이후 2016년 기고자에서 열린 이희준의 첫 번째 개인전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에서는 기존의 구상회화 작업에서 추상적 평면 작업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놓인 작품들이 등장했다.

이희준, 〈Interior nor Exterior no.24-27〉, 2016, 리넨에 아크릴릭, 마커, 각 162.2x130cm ©이희준

2015년부터 진행해온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 시리즈 또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건축적 환경의 미적 조형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이희준은 대리석이나 노출된 콘크리트 등 건축물의 표면과 같은 요소들이 이루고 있는 디자인적 미감을 포착한다.

그의 작업은 수집한 풍경을 확대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거쳐 외부의 풍경을 수직, 수평의 색면으로 기호화하고 화면 위에 재구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 시리즈는 그러한 건축 풍경을 평면적 가상의 공간으로 옮김으로써 내부도 외부도 아닌, 조형적 구조와 표면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간성을 만들어낸다.

이희준, 〈Venetian Blind no.11〉, 2017, 리넨에 유채, 색연필, 72.9x53.2cm ©이희준

한편, 2017년에 선보인 ‘에메랄드 스킨’ 시리즈는 건물 외부가 아닌 실내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이 시리즈는 인테리어 공사를 마친 자신의 집 거실 벽면에 에메랄드 빛으로 블라인드의 그림자가 맺힌 것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이희준, 〈Venetian Blind no.11〉, 2017, 리넨에 유채, 색연필, 65.3x50.2cm ©이희준

이희준은 이 작업에서 블라인드 자체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소재로 삼기보다는, 어느 한 순간 블라인드에 맺힌 이미지의 표면과 그 위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변주를 화면에 담아내고자 했다.

블라인드는 내부에 설치되는 사물이지만 외부와 내부를 분리하는 동시에 연결하는 중간자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햇빛과 내부에 존재하는 물체 사이에 존재하는 막으로서 기능하며, 환경적 요인에 따라 표면의 이미지가 변화하게 된다.


이희준, 〈A Shape of Taste no.101〉, 2018, 캔버스에 유채, 182x182cm ©이희준

2018년부터 진행해온 ‘A Shape of Taste’ 시리즈는 이희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수년 간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가 마주한 서울의 변모한 풍경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회화 작업이다. 작가는 익숙하지만 낯선 도시 풍경을 마주하며, 자신이 생활해온 지역을 구성하는 다양한 색과 기하학적 형태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희준, 〈A Shape of Taste no.44〉,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53x53cm ©이희준

이희준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건축물과 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프린트한 다음, 그 위에 드로잉 한 것을 회화로 옮겼다. 도심의 풍경은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거쳐 형태나 색감이 극도로 단순화된 정방형의 추상회화로 번안된다.

한편 2018년 이후 3년만에 다시 선보인 ‘A Shape of Taste’의 2022년 작품들은 이전 작업과 달리 드로잉을 철저하게 따르기 보다 작은 네모나 점 등 작가만의 시각 언어가 중간중간 포함되어 나타난다.

이희준, 〈Sculpture upon Sculpture no.1〉, 2019, 나무, 종이, 색연필, 가변 설치 ©이희준

2019년부터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평면에서 나아가 입체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희준은 색면추상의 화면을 해체, 분해하고 재구성하여 미니어처 조각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작가는 전시장 모서리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기존의 평면 추상 작업을 축소된 형태로 설치하거나, 입체 조각으로 변환된 작업들을 함께 둠으로써 매체적 경계를 오가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희준, 〈A Dry Land〉, 2020, 캔버스에 아크릴릭, 포토콜라주, 73x73cm ©이희준

2020년에 선보인 ‘The Tourist’ 시리즈는 여행을 어떤 방식으로 저장하고 추억하는지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제작되었다. 작가는 여행을 하며 습관적으로 찍게 되는 핸드폰 사진이 눈으로 대상을 즐기는 여행의 즐거움을 데이터 메모리 칩 속에 작은 파일로 대체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과 함께 제작된 포토콜라주 작업 ‘The Tourist’는 핸드폰 속 사진 데이터로 존재하는 추억들을 회화적 세계로 불러옴으로써 경험, 기억, 감정, 촉감과 같은 것들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고 기억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희준, 〈The Temperature of Barcelona〉,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포토콜라주, 160x160cm ©이희준

이를 위해, 작가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출력해 캔버스에 콜라주를 하고 그 위에 풍경에 각인된 자신의 촉각, 시각, 후각 등의 감각을 다양한 점, 선, 면, 곡선 등의 요소와 색감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포토콜라주 작업은 2021년 ‘Image Architect’ 시리즈를 통해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동안 추상회화의 색면에 녹아져 있던 작가의 기억 속 풍경들은 포토콜라주를 통해 구체적인 형상으로 노출되었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다양한 색, 드로잉적인 선, 기하학적 도형 등을 쌓아 올리며 화면을 분할하기도 하고, 새로운 면을 생성하기도 하는 등 화면 속 공간을 전면에 드러내는 동시에 지운다.

이희준, 〈On Board a Ship〉,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포토콜라주, 160x160cm ©이희준

흑백의 사진 위에 물감을 두텁게 올리고 질감을 강조하는 등의 방식과 형식은 작가의 추상회화에 새로운 레이어와 질감을 만드는 동시에, 작가의 기억과 감각 그리고 시간까지 켜켜이 쌓아 올린 건축적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희준, 〈식(蝕): 겹쳐진 시간, 펼쳐진 공간〉,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포토콜라주, 300x900cm ©이희준

이희준의 최근 작업에서는 서로 다른 시공간이 한 화면에 중첩되는 방식으로 뒤얽혀 나타난다. 사진첩에 저장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진들을 회화를 통해 연결하고 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 과정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이 모호하게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시한다.

이러한 경향은 2024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시공時空 시나리오》에서 선보인 〈식(蝕): 겹쳐진 시간, 펼쳐진 공간〉(2024)에 잘 드러난다. 이 대형 회화 작업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이 가지고 있는 건축적 특성과 함께 작가가 여러 시간에 걸쳐 경험한 미술관을 한 화면에 연결한 결과물이다.

이희준, 〈접힌 공간, 연결된 시간과 기억〉, 2024, 경첩이 있는 나무 위에 아크릴릭, 포토콜라주, 118x252x60m ©이희준

이희준은 시차를 달리하는 건축물의 사진을 콜라주하고 그 공간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감각들을 기하학적인 회화 언어로 풀어내어 서로 한 화면 안에 중첩시킨다. 이러한 회화 속 다층적인 시공간성은 이후 접었다 펼 수 있는 조각의 형태로 변주되며, 더욱 가변적이고 건축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나타났다.

이처럼 이희준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을 가져오며 그 풍경이 가진 미적인 감각과 그에 연관된 자신의 기억을 추상회화의 언어로 시각화 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회화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일상의 순간을 되새기고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물감을 한 겹 한 겹 올리면서 조금 더 세밀하게 어떤 감각에 접근하고, 그때그때 달라지는 감정, 생각, 감각, 혹은 기억 같은 것을 담습니다. 그 주변으로 화면 위를 부유하는 작은 조형들은 곳곳에서 또 다른 기억과 감각을 촉발하며, 관람자의 사유를 새로운 지점으로 안내합니다.” (이희준, 비애티튜드 인터뷰에서 발췌) 


이희준 작가 ©국제갤러리

이희준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글라스고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이희준 개인전》(국제갤러리, 부산, 2022), 《Image Architect》(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1), 《The Tourist》(레스빠스 71, 서울, 2020), 《Emerald Skin》(이목화랑, 서울, 2017)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서울시립미술관(서울, 2024), 송은(서울, 2022), 아트선재센터(서울, 2021),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서울, 2019), 뮤지엄 산(원주, 2019), 학고재갤러리(서울, 2018), 아퀴에이리 미술관(아퀴에이리, 아이슬란드, 2016) 등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신생 공간 ‘노토일렛’(2014~2015)을 운영하며 다수의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네오트리모이 투마주(니코지아, 키프로스) 레지던시에 입주한 이력이 있고 2019년 퍼블릭 아트 주관 뉴히어로 대상작가로 선정 되었다. 그의 작품은 서울시,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