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리(b. 1985)의 작업은 작가의 주변에 존재하는 작고 사소한
존재들과 순간을 바라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자신이 키우는 식물들 또는 먹고 남은 포도가지처럼
그의 주변에 고요히 존재하고 있는 작은 것들을 내밀하게 관찰한 후, 자신의 감각을 바탕으로 하여 대상이
지닌 순수한 본질을 회화로써 표현해 왔다.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던 작가에게 있어서 식물은 심리적 정착을 느끼게 해준 매개체와 같았다. 이안리는 식물을 키우며 각 생물이 가진 형태와 변화를 관찰하고 교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감정과 상황을 드로잉, 회화, 콜라주, 조각
등 다양한 작업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이안리는 자신의 작업 노트에서 “식물적 가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객관적인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현실에 존재하고 그것과 내가 함께 가고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그의 삶과 주변의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고전주의 회화에 영향을 받은 이안리는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발견한 대상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균형감 있게 표현해
왔다. 그렇기에, 그의 회화는 대상의 겉모습을 재현하기보다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가는 ‘시학적 과정’의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피어나고 지기를 반복하는 꽃과 같은 생명체, 즉 연속적인 변화의 과정을 가진 자연물과 삶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체화한 보이는 것 너머의 감각들을 구조화하는
것이다.

이안리, 〈블랙 비너스〉, 2011, 종이에 연필, 169x130.5cm ©원앤제이 갤러리
이안리는 특히 꽃의 수술, 꽃밥, 씨방, 꽃방, 암술대 등과 같은 꽃을 구성하는 기관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관들은 보이는 것 너머 다른 지각적 세계를 소환하는 매개체다. 꽃가루 주머니를 품은 수술, 원형의 암술대의 점액질과 같은 원소적이고
잠재적인 세계는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이안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단순히 미의 전형으로 대상화된 꽃이 아니라 생명으로서의 구조(anatomy)를 상상할 것을 제안한다.

2017년 성북예술창작터에서 열린 전시 《살랑이는 예술군도》에서 선보였던
드로잉 설치 작업 〈달과 열매와 새, 극한의 어휘들〉은 작가가 오고 갔던 공간과의 관계 속에 얽혀 있는
존재들을 다루고 있다. 작업의 큰 상징적 뿌리인 달과 열매와 새는 어느 날 작가가 존재했던 시공간 속에서
마주한 대상들로, 서로 다른 객체들이지만 작가의 순간 안에 서로 묶여 있으며, 또 작가와 함께 묶여 존재한다.

이안리, 〈새〉, 2009, 종이에 흑연, 180x130cm ©이안리
이안리에게 풍경은 시간의 어느 한 순간, 주어진 공간 속에서 서로
포개어지는 형상들 속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명백하고 단순한 대상들을 삼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과 함께 얽혀 만들어진 결을 주제로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구부러지고 갈라지거나, 덩어리지고 마디를 맺는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2020년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린 전시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I, Etcetera》에서는 일상에서 발견한
재료들을 이용한 오브제 설치, 잉크와 연필을 사용한 드로잉, 콜라주
작업들을 새롭게 선보였다.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주변의 작은 존재들과 순간들을 주목해온 작가는
발견된 것들을 손으로 엮어 자신만의 작은 우주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드로잉 연작인 ‘스물셋 우연의 일치’(2020)는 매일 일기를 작성하듯 지속적으로 진행해온 작품으로, 식물을
돌보며 목격한 고요하고 작은 사건과 변화로부터 기인한 정서들을 담고 있다.

이안리는 그의 삶 속 작은 순간들과 감정들을 고이 담은 일련의 드로잉 작품들과 함께 작가의 부탁으로 작가의 친구이자
시인인 임유영이 쓴 시 「도둑들」(2020)을 묶어 선보였다. 이안리는
임유영과 ‘콜렉티브 안녕’이라는 이름의 우정, 감각, 직관을 배양하는 유연한 작업 공동체를 진행해 왔다.

그리고 다른 출품작인 ‘세계 가정적 필기체 사무소’(2020) 시리즈는 사물 사전인 『1000가지 사물의 세계사(Historia del Mundo en 1000 Objetos)』의 페이지들과 작가의 드로잉을 콜라주한 작업이다. 인류문명사의 유명한 사물들과 어우러진 그의 드로잉은 종이포대를 재활용한 거친 평면 위에서 작가만의 독창적인
도상학을 만들어낸다.

한편 2023년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오렌지 잠》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사물인 ‘비누’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비누는 불순한 오염 물질을 씻어내는 물건이지만 여러 손이 닿는 순간 매끄러웠던
형태는 껄끄러워지면서 그다지 손대고 싶지 않은 물질로 변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깨끗하게 더러운, 매끄럽게 껄끄러운 비누의 미묘하고
모순된 상태에 주목했다. 회화 작업 〈오렌지 잠〉(2023) 또한
전반적으로 포근한 이미지를 띄지만 흐릿하고 하얀 형상 위로 거칠고 훼손된 표면이 보인다. 작가는 쓰임에
의해 사라져버린 비누의 부피, 살과 살의 마찰로 잃어버린 형태를 기억하며 촉각적인 방식으로 이미지화
했다.

2024년에 열린 작가의 개인전 《퍼크와 밤의 그림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서 출발한다. 이안리는 희곡 속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인간들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사건을 일으키는 요정 ‘퍼크’에 자신을 대입했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마치 퍼크처럼 자신의 일상에서 겪은 관계에서 비롯한 감정과 경험들을 담아낸 작품들을 선보였다. 새로운 관계를 기대하듯이 캔버스에 물감을 툭툭 던지거나,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관계처럼 의도로부터 어긋나는 즉흥적인 선을 긋거나, 비밀처럼 작가 자신만 알 수
있게 그림 속에 슬며시 무언가를 그려 놓았다.

그리고 전시에서 선보인 〈키스〉(2024), 〈카니발 색종이〉(2024), 〈올리브 트립〉(2024)을 비롯한 신작들은 이전 작업인
〈오렌지 잠〉처럼 텍스처가 느껴지는 촉각적인 회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들은 주로 조각에서
쓰이는 재료인 ‘모래’를 주재료로 삼고 있다. 이안리는 조각을 만들어왔던 자신의 경험과 천천히 쌓아 나갈 수 있는 모래의 특징을 활용해 회화에 녹여냈다고
한다.
그는 모래, 아크릴, 각종
안료들을 섞어서 캔버스 위에 칠하고, 마르면 다시 긁어냈다가, 다시
칠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처럼 작가는 손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거듭하는 방식을 통해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작가 주변의 세계와 소통한다.

이처럼 이안리는 자신의 몸을 통해 그의 주변 세계와의 ‘반응’을 감각적인 형태로 구현해 왔다. 이러한 이안리의 몸짓은 자기 자신과 세계, 그리고 미술 사이를 연결하고자 하는 미적 수행으로 나타난다. 그는 정서적인 시선과 몸짓을 통해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관계로 엮어 내며 자기만의 소우주를 형성한다.
”나의 우주에서 이 작은 사건들은 각각의 전체를 만든다. 나의 내러티브 속에서 크고 작은 작업들은 공동의 운명을 갖는다. 나의 세계 속에서 변형의 메커니즘을 즐긴다.” (이안리, 작가 노트)

이안리는 파리 국립 고등 미술학교에서 학사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였다. 개인전으로는
《퍼크와 밤의 그림들》(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24); 《이안리의 살구 바》(드로잉 스페이스 살구, 서울, 2018); 《네. 다섯
개의 거울》(드로잉 스페이스 살구, 서울, 2016)이 있고, 2인전으로는 《오렌지 잠》(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23)을
개최하였다.
참여한 주요 국내외 단체전으로는 《언박싱 프로젝트 3: 마케트》 (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4);
《잘 지내나요?》 (경기도미술관, 경기, 2023); 프리즈
No.9 Cork Street, 런던 (2023); 《어떤 사물, 그리고 몸짓들》 (우민아트센터, 청주, 2022); 《2022 Sea & Museum 바다와 미술관 : 바다를 위한 예술과 예술가》(이강하 미술관, 광주, 2022); 《몸짓의 구조》(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22);
《지역네트워크교류전 2018: 이상동몽》 (제주현대미술관, 제주, 2018); 《살랑대는 예술군도》(성북예술창작터, 서울, 2017) 등이
있다.
References
- 이안리, Ahnnlee Lee (Artist Website)
- 원앤제이 갤러리, 이안리 (ONE AND J. Gallery, Ahnnlee Lee)
- 정현, 꽃즙 머급은 살갗_이안리의 예술로 삶되기
- 성북예술창작촌, 살랑대는 예술군도 (Seongbuk Creation Center, The Flirting the Art Archipelago)
- 하이트컬렉션,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I, Etcetera (HITE Collection, I, Etcetera)
- 원앤제이 갤러리, 퍼크와 밤의 그림들 (ONE AND J. Gallery, Puck, Nocturnal Paint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