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노혜리 (b.1987)는 자신의 이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오브제 설치 작업과 다언어적 단편 서사 기반의 퍼포먼스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유년기 다양한 나라에서의 이주 경험으로 만들어진 다층적인 이야기들을 공간, 신체, 언어, 사물을 통해 엮어낸다.

노혜리, 〈나성〉, 2016, 퍼포먼스 ©노혜리. 사진: 정지필

이민자의 자녀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해 십대 시절 한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이후 유학생의 신분으로 다시금 미국에서 생활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주거지를 이동하며 살아온 그의 삶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이동이 가능한 형태로 작품을 제작하고, 자연스럽게 언어를 변환하고, 짧은 단어들로 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업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업은 사물, 움직임, 이야기라는 세 가지의 요소가 상호 연결되면서 만들어진다. 그 중에서 사물은 작업의 출발점으로, 주로 합판, 각목, 튜브, 비닐 등 구하기 쉬운 대량 생산된 재료들부터 돌, 음식의 껍질 등 버려진 것들까지 매우 사소한 오브제들로 꾸려진다.

노혜리, 〈Thirty-thousand Dollars In a Box〉, 2019 ©노혜리

이러한 사물들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함축하지 않는다. 김해주 큐레이터는 “대체로 추상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사물들은 공간 안에 나열되거나 중첩되어 있을 때 마치 펜으로 드로잉을 한 것처럼 선과 면의 구성된 장면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추상성은 몸과 말이 다 함께 뒤엉킬 때 여러 형태의 서사로 자유롭게 연결될 가능성을 품는다. 그의 사물들은 이야기를 직조하기 위한 도구로서 작품 안에 자리한다면, 몸은 그 사이를 움직이며 서사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노혜리, 〈천장 만나기〉, 2013, 비디오 ©노혜리

그의 초기 작업은 주로 제한된 조건 안에서 몸의 움직임을 실험하곤 했다. 예를 들어,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 〈천장 만나기〉(2013)는 벙커 침대의 매트리스와 천장 사이라는 비좁은 공간을 무대로 삼는다. 천정과 몸이 닿은 상태를 유지하며 진행되는 이 퍼포먼스는 한 번 닿은 부위는 다시 닿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며, 그 틀 안에서 유지 가능한 시간만큼 진행되었다.

여기서 몸의 움직임은 주어진 사물과 공간의 구조 안에서만 허용되며 퍼포머 또한 사물의 논리에 편입된다. 주어진 환경을 자신의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없게 된 신체는 고정된 틀에 맞추어 지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지만 결국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노혜리, 〈나성〉, 2016, 퍼포먼스 ©노혜리. 사진: 봉완선

한편 ‘나성(LA-sung)’(2016-2017) 시리즈를 기점으로 오브제의 성격과 작가가 오브제를 다루고 개입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전의 퍼포먼스 작업에서 신체는 사물의 논리에 따르는 수동태로 존재하였다면, 이 작업에서부터 마련된 무대 세트 위에서 이야기를 하며 오브제를 다루는 자가 된다.

이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LA에 20년째 살고 있는 아버지와 서울에 15년째 살고 있는 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 작업인 〈나성〉(2016)에서 퍼포머는 자신의 신체 사이즈와 비슷한 크기의 나무판을 바닥에 펼쳐 두고 손바닥보다 작은 오브제를 만지작거리면서 개인적 경험과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혜리, 〈피아노〉, 2016, 퍼포먼스 ©노혜리

이후 작업들부터 점차 오브제와 몸 사이의 연계성을 높이고, 몸의 움직임과 오브제의 스케일을 키우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두 번째 작업인 〈피아노〉(2016)는 〈나성〉의 프리퀄이 되는 내용으로, 유년시절 구체적인 기억의 파편들을 엮는다.

두 명의 퍼포머는 목재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맴돌며 그 주변에 놓인 석고와 테라코타, pvc호스, 철사 등의 재료로 만들어진 오브제들을 움직이며 내레이션을 한다. 이러한 몸짓과 내레이션을 통한 오브제들과 상호작용 안에서 유년시절 구체적인 기억의 파편들이 엮이게 된다.

노혜리, 〈삼만불〉, 2016, 퍼포먼스 ©노혜리

세 번째 작업인 〈삼만불〉(2016)은 가장 확장된 무대 구성 안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퍼포먼스를 통해 전개해 나갔다. 퍼포머는 보다 넓어진 무대 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석분토의 얇은 철사나 나뭇가지를 얹어 세우거나, 철골 지지대에 한쪽을 얹어 놓은 널빤지의 반대편 끝부분을 이마에 아슬아슬하게 맞대고 반절하듯 자세를 낯주거나, 경첩으로 이은 나무판을 벽에 세워 놓는 동작을 수행한다.

이러한 직립 또는 자립을 이루고자 애쓰는 퍼포머의 몸부림은 오브제의 물성이 가진 불안정함과 충돌하게 된다. 여기에 삼백, 삼천, 삼만으로 부풀려지는 빚과 관련된 자전적인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부단한 노력과 실패가 맞물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노혜리, 〈로망스〉, 2017, 퍼포먼스 ©노혜리

시리즈의 네 번째 작업 〈로망스〉(2017)는 무대와 이야기의 형식적 구조의 연계를 고민하고 코레오그래피적인 요소가 더해진다. 아슬아슬하게 직립해 있는 나무 구조물들과 파란색 호스로 이루어진 공간이 바닥에 일렬로 배열되어 퍼포먼스의 무대로서 위치한다.

퍼포머는 이 무대 혹은 경계를 오가며 다소 절제된 안무를 이어가고, 이야기는 기억 속 장면들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 하는 듯 하지만 단어 수준으로 분절되어버린다. 이 안에서 퍼포머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오브제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가령 다리를 뻗어 자세를 낮추고 바닥에 있는 오브제를 집거나, 목각 공간에 몸을 맞추어 앉거나, 바닥에 눕는 등의 행위가 이어진다.

노혜리, 〈키드니〉, 2017, 퍼포먼스 ©노혜리

시리즈의 마지막 작업인 〈키드니〉(2017)는 신체 사이즈와 유사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대 공간 안에서 키드니(신장) 두 개와 무릎 두 개라는 신체 부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작업에서는 오브제-신체 사이의 연계성이 더욱 긴밀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무대 안 오브제와 신체는 서로를 의지하며 비슷한 움직임을 만들어 내어 조응한다.

총 다섯 개의 작업으로 구성된 ‘나성’ 시리즈는 오브제와 신체, 그리고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며 파편적으로 기억 속에 머물러 있던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들을 모으고 엮어 뼈대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진희》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2) ©노혜리

인간의 몸과 사물이 만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직조해 왔던 노혜리는, 2022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 《진희》에서 동물의 몸과 사물, 그리고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 ‘진희’의 몸과 사물을 매개로 한 서사를 풀어나갔다.

프로젝트 ‘진희’는 작가가 유기견 ‘지니’를 키우면서 구상하게 된 작업으로, 동물의 몸으로 감각하는 사물과 인간이 감각하는 사물의 공통점과 차이를 다룬다. 작가는 지니의 시선으로 주변 공간을 관찰하며 우리에 갇힌 지니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를 어떻게 감각하고 인식할지 고민했다.

노혜리, 〈갈비〉, 2022, 구운 점토, 줄, 21x30x19cm / 〈이〉, 2022, 돌, 에폭시 레진, 구운 점토, 15x17x5cm, 《진희》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2) ©노혜리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몸의 접촉과 통행이 가능한 구조물부터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거대한 차단 장치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관계가 이렇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장막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관객은 전시 공간 속 구조물들 사이를 움직이며 3인칭 관찰자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등 다양한 감성의 시점을 오가게 된다.

바닥 군데군데 놓인 오브제들은 치아, 책상, 배꼽, 탯줄 등과 닮았지만 정확히 무엇이라 쉽게 규정할 수 없는 형상을 띄고 있다. 이처럼 전시장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선명히 규정될 수 없는 오브제들 그리고 관계들로 얽혀 있음으로써 관객은 진희(사람)의 시점과 지니(동물)의 시점이 교차하는 경계에 놓이게 된다.

노혜리, 〈폴즈〉, 2022, 혼합 매체, 가변 크기, 《아트스펙트럼 2022》 전시 전경(리움미술관, 2022) ©노혜리. 사진: 김상태.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아트스펙트럼 2022》에 출품한 〈폴즈〉(2022)의 경우에는 오브제를 통해 현대사와 개인사를 엮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 작업은 1997년 금융위기, 2001년 9.11 테러,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이라는 세 가지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다양한 배경을 가진 개인의 삶이 중첩되는 지점을 따라 흐른다.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구조물들은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와 보안 검색대 같은 현실의 풍경을 연상시키고, 수직 하강하는 경제지표 그래프나 공항 내부 이동 안내선과 같이 추상적인 코드와 연결된다. 그리고 일부 구조물은 퍼포먼스의 무대가 되는데, 그 곳에서 이루어지는 작가의 움직임은 구조물과 반응하며 이민과 이주에 대한 사적인 경험을 발화한다.

《August is the cruelest》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25) ©두산아트센터

현재 두산갤러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인전 《August is the cruelest》에서는 사물을 통해 여름, 이동, 여정, 이별과 상실을 둘러싼 작가의 기억을 펼쳐 놓는다. 그동안 노혜리의 사물은 특정한 대상을 연상시키지 않는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조각으로 변화했다.

그의 조각들은 자동차, 텐트, 카약 등 여행과 이동을 암시하는 사물의 형태를 띄고 있으나 본래의 기능은 상실한 채, 안과 밖이 뒤집히거나 비틀린 형태로 전시된다. 달릴 수 없는 차, 누울 수 없는 텐트, 항해 불가능한 카약에는 작가와 그의 아버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노혜리, 〈니로〉, 2024, 나무, 알루미늄, 황동, 도자, 돌, 철, 자석, 아크릴, 레진, 주석, pvc 호스, 페이퍼 마셰, 180x437x152cm, 《August is the cruelest》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25) ©두산아트센터

〈니로〉(2024)는 작가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몰던 기아 자동차 ‘니로’를 본떠 만든 작품으로, 여기서 자동차는 단지 이동 수단이 아닌 생계와 생존의 문제로 연결된 미국에서의 삶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관객은 이 자동차 조각 뒷좌석에 앉아 어딘가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동의 모든 여정이 담긴 사운드를 들으며 누군가는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장소’를 상상하게 된다.

이처럼 노혜리의 작업은 사물과 몸을 매개로 자신의 개인사 또는 현 시대를 관통하는 서사들을 풀어내며 감각적 경험을 통한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해 왔다. 그 안에서 사물들은 본래의 의미와 쓸모가 지워진 채 사람의 몸과 언어와 연계되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협업자로서 존재한다.

오브제-몸-나레이션으로 직조된 그의 작업은 개개인의 삶에서 역사와 개인, 거시와 미시, 안과 밖 사이의 경계가 교차하는 지점들을 다루며, 오늘날 다층적인 삶의 경험과 정서를 감각적인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것 또는 저것이 아니라, 이것인 동시에 저것인 몸과 장소의 가능성” (노혜리, 작가노트)

노혜리 작가 ©Canal Projects

노혜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원 조각과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August is the cruelest》(두산갤러리, 서울, 2025), 《니로》(카날 프로젝트, 뉴욕, 2024), 《진희》(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2), 《나성》(양주777갤러리, 양주, 2017)이 있다.

이와 더불어 작가는 수림큐브(서울, 2024), 빌리타운(헤이그, 네덜란드, 2024), AHL 파운데이션 갤러리(뉴욕, 2024), 리움미술관(서울, 2022), 일민미술관(서울, 2019), 하이트컬렉션(서울, 2017), 아키요시다이 국제예술촌(미네, 일본, 2017), 두산갤러리(서울, 2017) 등 국내외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또한 노혜리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서울, 2025), 더 제니 크레인 그랜트(뉴욕, 2024), 리마 홀트 만 파운데이션 이머징 아티스트 그랜트(뉴욕, 2023), 필드 프로젝트 세라믹 레지던시(브루클린, 2023), 니스 파운데이션 인터내셔널 레지던시(브루클린, 2022) 등을 포함해 다수의 지원 및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