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완(b. 1987)의 작업은 특별히 아름답거나 조화로운 형태의 대상이 아닌 철 지난 광고, 길가에 쭈그러진 채 방치된 사물처럼 중요하다 여겨지지도, 선호되지도 않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작가는 묘하게 시선을 끄는 이러한 장면들을 캔버스 위에 옮기는데, 이때 형상을 묘사하기보다는 대상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와 감성을 표현하려 한다.

《싱거운 제스처들》 전시 전경(공간 가변크기, 2018) ©공간 가변크기

2018년 공간 가변크기에서 열린 박노완의 첫 번째 개인전 《싱거운 제스처들》은 일상에서 발견한 보잘 것 없는 존재들에게서 느낀 유머러스한 감각을 다룬 작품들을 선보였다. 박노완은 식당 앞에 뜬금없이 서 있는 호객용 마네킹의 얼굴, 눈이 몰려 우스꽝스러워진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PC방 모니터 메뉴판에서 발견한 삶은 계란 사진 등을 그렸다.
 
이런 엉성한 대상들은 작가에게 있어서 기피감 또는 불쾌함이 드는 동시에 어딘가 실소를 유발하는 것들이다. 박노완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회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그저 나뒹굴고 있는 존재들을 바라보며 모종의 기시감과 자기 동일시의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싱거운 제스처들》 전시 전경(공간 가변크기, 2018) ©공간 가변크기

그는 자신을 빗대어 보게 하는 대상들을 채집하고 이들을 캔버스 위에 옮겼다. 그러나 대상들은 캔버스 위에 선명하게 그려지기보다 세부 요소들은 생략된 채 흐릿하고 탁하게 표현된다. 또한 화면 속 배경과 오브제가 우선순위 없이 균등한 에너지와 방식으로 그려져 뚜렷한 경계 없이 뒤섞이게 되며 모호한 형상으로 드러난다.
 
박노완은 형태의 선명함을 덜어내기 위해 붓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화면 안에 가득 채워 그린 후 그 위에 흰색 물감을 섞어가며 채도를 낮추고 음영을 최소화하며, 문지르거나 아라비아 고무액으로 마른 물감을 녹여내어 얼룩을 만들었다.

박노완, 〈비닐봉지와 마네킹다리〉, 2019, 캔버스에 수채, 194x145cm ©박노완

이러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화면에는 수많은 붓 자국들과 붓에 긁힌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 이 물리적 흔적들은 무언가를 그리고자 하면서도 지우고자 하는 양가적인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보이는 대상을 분명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전통 회화와 달리, 그의 그림은 뭉개진 얼룩으로 흐트러진 형상들을 드러내며 쉽게 의미를 규정할 수 없도록 한다.

박노완, 〈무제〉, 2020, 캔버스에 수채, 116.8x72.7cm ©박노완

박지형 큐레이터는 이에 대해 “그가 한 개인으로서 일상과의 관계, 또 작가로서 회화와의 관계를 확언하기를 잠시 유예한 지점에서 멈춘 물리적인 기착지”라고 보았다. 즉 그의 그림은 한 개인이자 작가로서 마주하고 수집한 세상의 단상들을 화면 안에 적확한 언어로 정의하길 유보하며 거리를 두는 태도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사람 얼룩》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1)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1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그의 두 번째 개인전 《사람 얼룩》에서는 특유의 화법을 바탕으로 그린 불분명한 인간 형상의 그림들을 선보였다. 대형 회화 속에 가득 채워진 인물의 형상은 그림자 같기도, 빛 바랜 기억 같기도 한 인상을 남기면서 점차 추상적인 이미지로 향해가는 모습을 띈다.
 
전시에서 선보인 일련의 그림들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등신대 조형물이 주었던 존재감에서 출발한다. 박노완은 인간 형상을 한 조형물부터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대상에서까지 어렴풋이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흔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사람 얼룩》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1)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그렇게 그려진 작품들은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하였으나, 그 형상이나 묘사에 충실하기보다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인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려졌다. 박노완은 대상이 지닌 감각적인 느낌을 표현하고자 아라비아 고무를 수채 물감에 섞어 밀도 있는 마띠에르를 만들고, 붓을 포함한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표면을 긁거나 문지르는 행위를 거듭했다.
 
그림 표면 위에 고스란히 남겨진 물리적 흔적들과 시간, 그리고 재료의 물성은 대상이 가진 고유의 형태를 흐리는 대신 그 이면을 마주하려 하는 작가의 시선을 반영한다.

《텅 빈 주머니를 헤집기》 전시 전경(기체, 2022) ©기체

2022년 기체에서 열린 박노완의 세 번째 개인전 《텅 빈 주머니를 헤집기》에서는 회화 표면과 질감을 실험해 온 작가 특유의 작업방식을 더욱 심화하여 실험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전시 작품들은 버리지 못하고 오래 보관하고 있는 헤진 워커, 망가진 우산, 전단지, 교회 수건 등 보잘 것 없는 물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의 출처나 서사를 드러내기보다 그려지는 방식 자체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전시에서 새로이 선보인 작품들은 아라비아 고무 가루, 수채용 바인더, 물, 물감, 건조용 에탄올을 섞은 고무액으로 흰색 밑칠을 하고, 형상을 재구성해 그린 후 뭉개기를 반복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물로 농도를 옅게 하거나 붓롤러, 주걱, 손끝으로 화면을 헤집어가며 화면을 만들어 나갔다.

박노완, 〈큰 수건〉, 2022, 캔버스에 수채, 아라비아 고무, 290.9x251cm ©기체

예를 들어, 〈큰 수건〉은 오래전 어디선가 받아온 수건을 몇 년 동안 사용하다가 그것을 정물 삼아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는 작가의 우연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작가는 오래되어 뻣뻣해진 수건의 표면과 얼룩진 자국들을 화면 전체에 확대하여 한 폭의 추상화처럼 담아냈다.
 
전반적으로 분홍 빛을 띄고 있는 이 그림에는 곳곳에 파란색 얼룩이 스며들어 있다. 박노완은 이에 대해 “그림에 때가 낀 것처럼 얼룩덜룩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 전체에 얼룩처럼 스며든 이 파란색은 그림의 전반적인 느낌을 흐릿하게 만들며 추상적인 감각을 만들어 낸다.

박노완, 〈교회 전단지 부분 no.1〉, 2022, 캔버스에 수채, 116.8x91cm ©기체

다른 작품들에도 파란색이 그림 전체에 개입되어 있는 흔적들이 보인다. 가령 길에 떨어져 있던 전도용 교회 전단지의 일부분을 삼면화처럼 나란히 세 개의 캔버스에 옮긴 ‘교회 전단지 부분’(2022) 연작에는 파란색의 흐릿한 윤곽선이 그림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안소연 비평가는 작가가 파란색 윤곽선을 통해 회화의 표면을 열화시킨다고 보았는데, 그 방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윤곽선을 다른 색과 섞이게 하여 계속해서 지워내고 닦아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형태의 윤곽을 화면 속에 비약적으로 우겨 넣는 방식이다.
 
전단지 속 천국에 대한 세속적 욕망이 저급하고 노골적으로 그려진 형태들은 이러한 장치로 인해 그의 회화 안에서 뭉개지는데, 이는 망가져버린 현실과 오작동하는 듯한 구원의 세계를 회화적 상황에 대입하여 그러한 어긋남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킨다.

박노완, 〈동상들〉, 2023, 캔버스에 수채, 200x200cm, 《DMZ 전시: 체크포인트》 전시 전경(연강갤러리, 2023) ©리얼디엠지프로젝트. 사진: 아인아 스튜디오.

2023년 박노완은 DMZ 인근 마을과 역사 주변에서 발견한 석상과 동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DMZ 전시: 체크포인트》 전시에 참여하며 선보인 회화 작업 〈동상들〉(2023)과 〈석상과 거북이 장난감〉(2023)은 당시 DMZ에서 목격한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읽히는 대상들의 형상을 담고 있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뒤 다시 닦아 내길 반복하는 박노완의 기법은 대상이 지닌 형상을 지저분해 보이는 얼룩으로 치환하여 주변 환경과 세월에 의해 왜곡된 대상의 본질을 드러낸다.


박노완, 〈무제〉, 2024, 캔버스에 수채, 72.7x53cm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이처럼 박노완은 오늘날 가볍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적인 장면들 속에서 스스로 미묘하게 체감하는 인지적 변화를 회화로 구현해 왔다. 한편 2024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2인전 《다크 체인지》에서는 인물이나 사물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을 소재로 했던 이전과 달리, 기하도형을 토대로 한 추상적 표현이 돋보이는 회화 작업들을 새롭게 선보였다.
 
전시 기획자는 작가에게 무너진 세계의 이후를 상상하도록 요청하였고, 그 과정에서 박노완은 음울한 미래를 제시하며 인간에게 벌어질 피하지 못할 상황들을 암시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파국적 상황에 자신을 대입한 서사를 상상하며 시작된 이 작업은, 투박하면서도 날카롭게 그어진 기하학적인 선들로써 이를 회화적으로 재구성하며 더욱 심화된 추상성을 드러낸다.


박노완, 〈무제〉, 2024, 캔버스에 수채, 45.5x53cm ©갤러리 콤플렉스

사소한 일상에서 마주한 것들에 대한 주관적인 통찰과 관찰, 그리고 작가의 감정이입의 과정에서 재해석되어 만들어진 이미지는 모호한 형태와 독특한 물질감으로 표현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진지한 관찰을 이끌어내 왔다. 박노완은 이미지의 형상을 묘사하기보다는 이미지로부터 공명할 수 있는 감정을 최대한 표현함으로써 작가의 시선을 경유해 그가 그린 대상을 경험하며 느꼈던 감정을 목격할 수 있도록 한다.
 
그가 대상에게 느꼈던 것들은 아마도 모호한 감정,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어 명확히 인지될 수 없는 감각들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이고 적확한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감정과 감각들은 그의 캔버스 위에 수많은 붓질과 긁은 흔적, 여러 번 문지른 얼룩들, 그리고 두꺼운 물감 표면 등으로 치환되어 드러난다.

”저는 자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서 동어 반복적인 움직임을 많이 합니다. 제 결정이 헛된 일이지는 않을까 무섭기도 하고,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애초에 심화된 정서나 새로운 그리기 방식이 없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 모습이 마치 텅 빈 주머니를 계속해서 뒤지는 척하는 시늉 같았습니다. 비록 꺼내어 보여줄 것은 없지만, 주머니를 헤집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박노완, 디자인프레스 인터뷰 중 발췌, 2022.10.27)

박노완 작가 ©종근당 예술지상

박노완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조형예술과 석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텅 빈 주머니를 헤집기》(기체, 서울, 2022), 《사람 얼룩》(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1), 《싱거운 제스처들》(공간 가변크기, 서울, 2018)이 있다.
 
그가 참여했던 주요 단체전으로는 《이름을 문지르며》(일우스페이스, 서울, 2024), 《Keep Going #2》(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3), 《DMZ 전시: 체크포인트》(캠프그리브스, 파주; 연강갤러리, 연천; 2023), 《You Never Saw It》(기체, 서울, 2021), 《가볍고 투명한: Light and Crystalline》(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20), 《더더더!: MMMore!》(갤러리 SP, 서울, 2019) 등이 있다.
 
그리고 박노완은 2024년도 종근당 예술지상 수상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