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경(b. 1991)은 자유로운 드로잉과 과감한 색의 대비가 돋보이는 추상회화를 통해 한국 동시대 미술계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작가 중 한명이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것보다는 붓질의 반복적인 규칙성과 순간적인 궤적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조형 언어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성시경, 〈Green Bridge〉, 2016, 캔버스에 유채, 130.3x193cm ©성시경

성시경의 작업은 짧게 스쳐 간 형상이나 생각을 화면에 나타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기라는 행위는 미리 정해진 형태나 일정한 단위를 정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하는데, 그 과정은 유연하고 불특정한 개입을 허용한다.

성시경, 〈Ridge〉, 2017, 캔버스에 유채, 112.1x145.5cm ©성시경

그가 이러한 열린 태도를 지향하는 이유는 예측 불가능한 지점에서만 도출할 수 있는 형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미리 뽑아낼 수 있는 형태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성시경은, 발견되지 않은 것들을 캔버스 안에 적절히 들여오기 위해 상상과 이미 일어난 조형 둘 사이를 오가며 서로 이끌어 주는 상태를 조성하기로 하였다.


성시경, 〈Falls〉, 2018, 캔버스에 유채, 130.3x130.3cm ©성시경

이를 위해 성시경은 캔버스나 판넬, 혹은 종이가 제시하는 사각의 ‘틀’에 기댄다. 작가에게 있어서, 그림의 프레임은 조형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주체가 되며, 내부의 조형 요소와 상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성시경은 시간의 경과에 보조를 맞추어 전개될 수 있는 화면을 구성한다. 작가는 하나의 캔버스에서 페인팅 할 공간을 다중으로 가정하는데, 이는 캔버스 내부에 변칙적인 장치가 된다. 캔버스 안의 다중적인 화면들은 점진적으로 범위가 확장되거나 또 다른 영역과 관계를 형성하며, 작가의 예상으로부터 빗겨져 나와 다중적인 낙차를 만들어낸다.

성시경, 〈Yellow Bomb〉, 2018, 캔버스에 유채, 145.5x224cm ©성시경

성시경은 그리기의 과정에서 마스킹 테이프를 통해 화면 내부에 임의적인 영역을 다중으로 구획하고, 그 형태나 스케일에서 추상적 화면의 실마리를 찾는다. 즉, 분할된 칸의 제약이 만들어내는 파편적인 자율성 안에서 스치는 감각적이고 추상적인 사고의 조각들을 순간의 붓질로 포획하는 것이다.

프레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직관적인 선택들은 때때로 특정한 회화사적 레퍼런스나 관습적인 화면 처리 방식들이 무의식적으로 개입하게 되기도 한다.

《Exit Exit》 전시 전경(공간형, 2019) ©공간형

2019년 SHIFT와 공간형에 열린 성시경의 첫 번째 개인전 《Exit Exit》에서는 이러한 방법론을 기초로 2016년부터 진행해 온 ‘다중 프레임 장치’ 시리즈와 함께 기존 방법론을 변주하여 적용시킨 예외적인 작업들을 선보였다.

당시 전시를 기획했던 박정우 큐레이터는 프레임 외부로 뻗어 나가려는 조형적 흐름이 다시 캔버스의 경계에 의해 내부로 되돌려지는 작가의 방법론이 미로가 지닌 건축적 성격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미로와 같은 내부에 갇힌 작가의 붓질은 그 활력과는 별개로 정적인 이미지가 되고, 그로 인해 화면에 응축된 붓의 속력은 새로운 붓질의 동력으로 전환되거나, 축적된 붓질의 뒷면으로 남게 된다.


성시경, 〈Eight pieces〉, 2018, 캔버스에 유채, 91x151.6cm ©성시경

이처럼 성시경의 초기 작업은 예측이나 계획을 하지 않은 채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형상을 즉각적으로 그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반복된 장치 설정에 익숙해지며 붓질의 동선에 관성이 생기자 점차 긴장감이 감소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시경, 〈Untitled〉, 2020,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성시경

성시경은 이를 계기로 즉흥적인 것과 계획하는 것을 구분 짓는 경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성시경은 “그간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즉흥과 계획 그 둘 사이에 완고한 장벽이 있는 것처럼 여겼고 한쪽을 선택하고 그에 걸맞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성시경, 〈Tug of War〉, 2022, 캔버스에 유채, 150x120cm ©BB&M

이후 작가는 계획과 즉흥을 구분하기 위해 고안했던 ‘다중 프레임 장치’에서 벗어나, 캔버스 안에서 발생하는 붓과 물감의 움직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새로운 회화적 실험 과정에서 시작된 ‘잠보니’(2020-) 시리즈는 미끄러지는 듯 움직이는 붓질의 움직임을 잘 담아내고 있다.

잠보니는 아이스링크장에서 빙질을 고르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계인 정빙기를 의미한다. 성시경은새햐안 얼음을 부드럽게 갈아내듯 캔버스 전체를 흰색 유화 물감으로 덮은 후, 바탕이 마르기 전 촉촉한 상태에서 그리기에 돌입한다. 덜 마른 물감 위에 더해진 또 다른 붓질은 마치 빙판 위를 지나간 잠보니의 흔적처럼 화면에 속도감 있게 미끄러지는 그 속력과 궤적을 남긴다.  

《오랫동안, 갑자기》 전시 전경(d/p, 2023) ©d/p

2023년 d/p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 《오랫동안, 갑자기》에서는 이러한 ‘잠보니’ 시리즈의 기법을 활용해 그린 모듈형 벽화 작업 〈촉촉한 벽〉(2023)을 새롭게 선보였다. 성시경은 촉촉하게 스며드는 흰 벽에 벽화를 그린다고 상상하며, 벽체 면적에 맞추어 10개로 분할된 화면을 개별적으로 그렸다.

작가는 작업실에서 전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각각의 화면을 그렸고, 이를 현장으로 가져와 즉흥적으로 결합했다. 짧은 호흡과 즉흥적인 조합을 통해 완성된 〈촉촉한 벽〉은 큰 틀의 계획 안에서 켜켜이 쌓인 순간적인 선택의 뒤섞임을 드러낸다.

성시경, 〈붙잡고 있기〉, 2023, 캔버스에 유채, 165x202cm ©성시경

이와 함께 성시경은 오래전 중단했던 그림을 다시 마주하는 데에서 촉발된 상상을 바탕으로 한 작업을 진행했다. 성시경은 그림이 중단되었던 시간을 단절이나 중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연속적인, 숙성된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작가는 오래전의 생각과 갑자기 떠오른 생각 사이의 전환에 집중하며 이 시차를 달리하는 생각들을 한 화면에 담아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화면의 곳곳에 재배치했다. 이전의 선택과 즉흥적인 판단의 교차하며 생긴 궤적을 품은 화면 안에는 여러 생각의 시차가 담기게 된다.

성시경, 〈오델로 3〉, 2022-2023, 캔버스에 유채, 116x91cm ©성시경

성시경의 근작 ‘오델로’ 시리즈는 규칙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정한 패턴과 궤적 그리고 직관과 즉흥성에 온전히 맡겨진 자유로운 드로잉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 ‘오델로’는 녹색의 격자무늬 판 위에 흑색 돌이 앞과 뒤로 놓이면 가운데 백색 돌이 전부 흑색 돌로 변하게 되는 규칙을 가진 보드게임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러한 게임 법칙처럼 성시경은 캔버스에 물감이 올라가는 방식과 순서에 따라 선과 면의 경계가 계속해서 뒤바뀌고 변화하는 화법을 구상했다. 이러한 점, 선, 면의 유동적인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그림은 유연한 방식으로 작가만의 추상적인 조형 언어를 보여준다.

성시경, 〈오델로 - 깍지〉, 2024, 캔버스에 유채, 116x91cm ©성시경

이처럼 성시경은 구체적인 대상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보단 그리는 행위 자체를 앞세운 회화 작품을 선보여 왔다. 그의 화면 위에 교차되는 패턴의 규칙성과 순간의 직관을 따른 즉흥적인 드로잉이 만들어 내는 절묘한 조화는 앞으로 작가가 펼쳐 보일 흥미로운 회화적 실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계획성과 즉흥성'처럼 상반된 개념을 양 끝에 고정된 축으로 만든 상태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길고 짧다는 표현은 '더 길다', '더 짧다'라는 표현을 더해 그 위치가 계속 갱신될 수 있다. '길고 짧은'처럼 상대적인 형용사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더 면밀히 감각하고 설명하고 싶다.” (성시경, 작가 노트) 


성시경 작가 ©BB&M

성시경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개인전으로는 《오랫동안, 갑자기》(d/p, 서울, 2023), 《Exit Exit》(SHIFT, 공간형, 서울, 2019)이 있다.

최근 참여한 주요 단체전으로는 《언센티멘탈 에듀케이션》(BB&M, 서울, 2024), 《DMZ 전시: 체크포인트》(캠프그리브스, 파주, 2023), 《흰 그림》(팩토리2, 서울, 2023), 《투투》(P21, 휘슬, 서울, 2022), 《가볍고 투명한》(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20) 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성시경은 BB&M에서 4월 30일까지 진행 중인 단체전 《페이퍼 매터스》에 참여하며 종이를 바탕으로 한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