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헤윰(b. 1987)의 작업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훈련된 관점과
우리에게 익숙한 회화의 여러 양식에 관한 시지각적 관점 사이의 격차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회화를 이해하는 동시대의 시지각적 방법론을 추상의 언어로 실험해 오며,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어떤 현상을 이성적으로 정보화하지 않고서 인지하는, 원초적 시지각을 추상회화로 복원하려 한다.

디지털 세대인 배헤윰은 디지털 환경 안에서 이미지에 대한 시각의 틀을 넓혀 왔고, 이러한 시각적 경험은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접근 방향과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른 그의 작업은 운동하고 유동하는 형상을 정지된 화면 위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곧 회화의 본질적 딜레마를 회화로써 시각화 하겠다는 역설로도 읽힌다.
작가가 회화를 통해 담아내려고 하는 움직임이란 대상의 물리적인 변화뿐 아니라 그것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구체화하는
생각의 운동성과 시간의 흐름까지 포함한다.

2017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 《Circle to Oval》에서는 신체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일상의 모습을 사진적 구도로 담아낸 작품들을 선보였다. 운동 이미지를 담은 일련의 그림들은 연속적인 시퀀스를 이루고 있지만, 전시장에
작가가 설치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요소들로 인해 통일된 안정감에 균열이 생긴다.
벽화, 종이, 캔버스, 철판, 나무 합판에 이르는 다양한 재료와, 일정 규격을 거부하는 화면의 크기는 내용의 맥락과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전통적인 회화 디스플레이의 범주를
벗어난다. 또한 각기 다른 물성이 혼재되며 오브제의 질감을 연상시키는 촉각적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2018년 이후의 그림은 구체적인 유기체의 형태를 드러냈던 초기 작업에
비해 색면을 통한 추상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당시 배헤윰은 비구상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구조와 결합
양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했다.
OCI 미술관에서 가졌던 개인전 《꼬리를 삼키는 뱀》(2018)에서는 실체가 없는 생각에 형태와 색을 입히고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종이라는 소재를 빌려왔다. 배헤윰은 이를 위해 실물의 색종이를 관찰하는 대신 그의 머릿속에서 얇은 종이를 찢어도 보고, 접어서 세워 보기도 하는 등 평면으로 입체를 조형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상상했다.

배헤윰, 〈Slowly Ding Dong〉, 2018, 캔버스에 아크릴, 145.5x162.2cm ©OCI 미술관
화면에 옮겨진 작가의 조형적 상상에 의한 종이의 구조들은 실제로 가능하고, 또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며, 사실 이는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가 물성의 요소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사유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화면 위에 현현된 사유의 흐름은 강렬한 보색 대비의 색면들의 조합으로 드러난다.
배헤윰은 화면에서 구조적 결합 상태에 놓이는 색면끼리의 갈등이나 화합이 회화 특유의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가정한다. 역동적인 색면과 붓질의 진동을 담은 화면은 또 다시 관객의 상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 새로운 사유의 움직임으로
전이된다.

이러한 배헤윰의 작업은 대상을 눈으로 관찰하여 재현하는 전통적인 그리기의 방식과 다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최대한 고정된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지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배헤윰에게 작업 행위는 특정한 대상을 관찰하여 ‘그린다’기보다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 그림이 ‘나타나는 것’에 가깝다.

2019년 휘슬에서 열린 2인전
《Form/less》에서는 대상을 특정하고 관찰하는 것보다 자신을 정보 문맹으로 상정하고, 그림을 보는 체계나 생각의 구조를 평면에 옮기는 실험을 더욱 상세하게 정립한 그림들을 선보였다.
이 전시에서 배헤윰은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 회화의 요소들을 언어에 빗대어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이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처음 보는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내는 소리들을 추상적 사유와
연관 지었다.

배헤윰, 〈이면의 테로〉, 2019, 캔버스에 아크릴, 130.3x130.3cm ©휘슬
전시 출품작인 〈이면의 테로〉(2019)와 〈글 모르기 모험〉(2019)에서는 그의 작품을 스스로 복기하는 행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놓은 수를 하나씩 다시 두면서 연쇄적 흐름과 구조를 반추해보는 일을 의미하는 바둑 용어 ‘복기’는 그의 작업에서 사유의 이미지화를 위한 방식으로 차용된다.
배헤윰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캔버스에서 알 수 없는 이미지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색의 충돌과 붓자국만으로 운동성을 띠는지 실험하며 그림을 완성해 나간다.

배헤윰, 〈토이가〉, 2020, 캔버스에 아크릴, 227.3x162.2cm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1》에 참여하며 선보인 그림들 또한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의 형태들 간의 변주와 유기적인 구성을 통한 운동감을 담고 있다. 〈토이가〉(2020), 〈아쿠마〉(2020) 등의 제목을 가진 그림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연상케 하는 듯하다가도 색면의 추상성으로 인해 곧 우리의 인식에서 빗겨져 나간다.

배헤윰, 〈아쿠마〉, 2020, 캔버스에 아크릴, 145.5x112.2cm ©휘슬
자유로운 이미지의 조합은 오히려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원초적인 시각적 인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고도의 재현이 가능한 오늘날의 미디어로 인해 퇴화된 인간의 특정 지각 능력과 인지적 호기심은, 그의 그림 앞에서 다시금 자극되어 캔버스 너머의 장면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된다.

한편 2021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플롯탈주》전에서는 추상적인 구조
안에서 형태들이 허물어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만들어지는 의미심장한 가독성의 흐름을 플롯 개념으로 풀어냈다. 여러
요소를 유기적으로 배열하는 구성 방식인 플롯 개념을 반영한 그의 작업은, 다양한 방식의 관계 맺기와
자유로운 변주를 통해 회화의 조형성을 상기시키며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다.
그러한 유기적인 구성 과정에서 작가는 때로 자신의 작업을 복기하여 도상을 되풀이하는 등 본인 작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여 구조화하였다. 서로를 교차하며 변주를 이루는 도상들의 동적인 구성은 나아가 관객들이 자신만의 구조와 흐름을 만들어 편견없이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낸다.

2022년 프리즈 서울 ‘아시아
포커스’ 섹션에 참여한 배헤윰은 게임에서 점수를 얻는 시스템인 ‘스코어링’과 모바일 기기의 ‘잠금 해제’라는
감각에 대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배헤윰은 캔버스에서 여러 색면이 접촉하며 회화의 운동감과 균형을 이루었을
때, 암묵적으로 추상회화로서의 의미를 얻게 되는 쾌감이 마치 게임 속 시각 요소들이 서로 부딪치며 점수화되는
체계인 ‘스코어링’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한편 모바일 기기를 잠금 해제(unlock)하는 구조는 마치 추상의
세계로 진입하는 감각과 맞닿아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감각을 반영한 그의 추상회화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맞닿아 생활하는 우리의 감각 경험과 이어지게 되며, 전통적인 회화라는 매체가 현대의 미디어로써 어떻게 읽히고 소통이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배헤윰, 〈Absolute Tracker〉, 2022, 캔버스에 유채, 162.2x145.5cm ©배헤윰
이처럼 배헤윰은 추상회화를 통해 사유의 흐름과 생성을 포착한다. 그는
동시대의 시지각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매체 환경과 구조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전통 매체인 회화가
가진 고정된 관습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회화로써 작가 자신 그리고 관객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새로운 서사 구조와 체계에 대해 탐구해 왔다.
이러한 그의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곧장 연결되는 객관적인 거리를 조절하며 마치 수수께끼처럼 다가온다. 이는 곧 어떠한 형상을 발견하고 해석하려는 모든 인지적 행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의 사유를 더욱 자유롭게 만들어 원초적인 감각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만든다.
”붓놀림이나 붓의 흔적 같은 것들이 모두 무엇을 묘사하거나 지칭하지
않아도 어떤 구조를 읽거나 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소통 가능한 영역에 닿는 방법 아닐까. 그게
나에겐 암묵적 소통의 힘이다. (…)
암묵적인 것은 실천에 의한 지식이라 매뉴얼을 따라 해도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 없다. 나는 회화가 실천적인 현장에서 일이 많은 영역이며, 암묵적 지식과
관련 있다고 본다. 구조와 체계를 바탕으로 한 추상화로 암묵적 영역에서 소통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헤윰, 엘르 인터뷰, 2022)

배헤윰은 2010년 이화여자대학교 회화·판화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5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학의
드로잉·회화 전공 디플롬 과정을 졸업했다. 이듬해인 2016년에는 독일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대학교 실습 기반 연구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COMBO》(휘슬, 서울, 2021), 《플롯탈주》(금호미술관, 서울, 2021), 《Kyka
Foretold…》(SeMA 창고, 서울, 2021), 《꼬리를 삼키는 뱀》(OCI 미술관, 서울, 2018), 《Circle
to Oval》(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17) 등이 있다. 그리고 최근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021), 두산갤러리(서울, 2019), 하이트컬렉션(서울,
2018), 학고재 갤러리(서울, 2018),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서울, 2016)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배헤윰은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2020), 금천예술공장(2019)에서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동한 바 있으며, 그의 작품은
서울시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
- 학고재 갤러리, 배헤윰 (Hakgojae Gallery, Hejum Bä)
- 인천문화통신 3.0,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배헤윰, 2021.06.22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Circle to Oval (Project Space Sarubia, Circle to Oval)
- OCI 미술관, 꼬리를 삼키는 뱀 (OCI Museum of Art, Teeth on Tail)
- W컨셉, 아트 이슈 06 – 배헤윰, 2022.08.26
- 휘슬, Form/less (Whistle Form/less)
-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1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Young Korean Artists 2021)
- 엘르, 거대한 캔버스에 펼쳐낸 색면의 세계, 배헤윰 #프리즈서울 #포커스아시아, 2022.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