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마(b. 1988)는 드로잉과 오브제, 우발적인 행위와 향 등 다양한 매체와 다중적인 정체성을 경유하여 빛이나 공기처럼 가변적인 물질과 ‘여성적’ 혹은 부수적으로 여겨지는 존재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왔다.
작가는 사회의 기준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단단한 사회 구조의 틈 사이에
예외적인 감각을 개입시킴으로써 발생하는 해프닝과 그에 따른 감정들을 탐구하고 있다.

박보마의 작업은 순간 반짝이는 빛과 찰나의 순간이 지닌 감각을 가짜라고 치부되거나 사람들이 쉽게 버리는 물건들, 대체되는 이미지들과 겹쳐 보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존재들은
자본이나 사회 같은 시스템 안에서 주로 폄훼되는 것들로, 작가는 이들이 지닌 물질성과 힘 그리고 그의
반복(복제)을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하고 돌아보는 작업을 한다.
이를 위해 2013년부터 작가는 가상의 회사를 설립하거나 각기 다른
목적과 역할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외부적인 사건으로써 재현하고 발화하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박보마, ‘fldjf studio’ 설치 작업물(2010-2014) ©박보마
예를 들어, 박보마는 ‘반사체’의 개념을 투영한 반-가상 스튜디오 fldjf studio, 수작업을 통해 실제 물질을 감각하고 다루는 WTM
decoration & boma, 더불어 댄서 qhak, 미정이, 리셉셔니스트 R 등의 아이덴티티를 경유하여 배후의 회사를 암시하며
거대 자본의 집약체인 고층 빌딩을 한시적으로 점유하거나 조각, 오브제,
향, 사운드, 장식품 등을 제작했다.

박보마, ‘WTM decoration & boma’ 오브제 작업 (2018-) ©박보마
2014년부터 시작한 fldjf
studio에서는 벽, 프레임, 리본으로 감싼
평면 디지털 오브제(빛-덮개)를 약 1만여개 만들어 오며, 고층
빌딩의 유리창 등에 ‘반사되는 빛’을 그 반사되는 물질에
기대어 포착하고 그것을 다시 덮는 과정을 거듭했다.
한편 WTM decoration & boma (2018-)는
fldjf studio에서 파생된 감각의 형태를 지점토와 석고점토로 빚은 장신구와 소품을 제작하고 판매했다.

《Rebercca လက် and The Cost》 전시 전경(갤러리SP, 2019) ©갤러리SP
박보마는 이러한 일련의 프로젝트의 과정에서 나온 디지털 이미지, 프린트, 멜로디, 오브제 등을 서비스, 광고, 퍼포먼스, 이벤트, SNS를
통해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장식과 인테리어를 더해 설치한다. 이는
실체 없는 가상을 통해 미술의 형태를 존재하게 하기 위한 실험으로 볼 수 있다.

《Rebercca လက် and The Cost》 전시 전경(갤러리SP, 2019) ©갤러리SP
2019년 갤러리SP에서
열린 개인전 《Rebercca လက် and The Cost》에서 박보마는
그가 설정한 가상의 인물 ‘레베카 손’이 만든 향수를 판매하는
‘팝업 스토어’ 형식의 전시를 선보였다. 전시는 사고로 양팔을 잃은 채 향수를 만드는 러시아 남성 ‘레베카
손’이라는 인물이 만든 향수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 공간이 구성된다.

《Rebercca လက် and The Cost》 전시 전경(갤러리SP, 2019) ©갤러리SP
공간에 채워진 향은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며, 동시에
가상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와 함께 설치된 향을 위한 오브제는 이러한 향의 존재를 뒷받침하게 됨으로써
또 다른 방식으로 화이트큐브의 갤러리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박보마, 〈우리의 관계와 소피 에툴립스 실랑 회사의 시간〉, 2021, 디지털 편집 드로잉, 종이에 유화, 연필, 스티커, 스탬프, 구슬, 크롬 마커, 1090x877mm ©박보마
2021년 박보마는 2013년
이래로 펼쳐온 복수의 아이덴티티를 ‘Sophie Etulips Xylang Co.,’라는 가상의 회사로
집약하여 그간 실험해온 ‘가짜’들에 구체적인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부여했다. 이 가상의 회사는 진짜와 가짜, 숭고한 것과 하찮은
것, 가치 있는 것과 부수적인 것 등을 구분하는 체계를 재생산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온라인에서 열린 개인전 《Sophie Etulips Xylang Co.,》(2021-2022)는 실제 사회에 존재하는 ‘진짜’ 회사들의 공식 홈페이지가 취하는 형식을 차용했다. 그러나 이 웹사이트는
통상적인 회사 홈페이지에서 예상되는 내용을 지움으로써 자본주의적이거나 남성주의적인 언어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Sophie Etulips Xylang Co.,》 스크린 캡처 ©박보마
일정한 순서를 따라 점진적으로 회사를 소개하는 웹 프레젠테이션은 사진, 디지털
이미지, 사운드 등 다채로운 매체를 통해 아이러니한 설립 신화와 연혁,
빛을 다루는 기술, 파편화된 신체와 그림자로 출몰하는 회사의 주인과 임원진 등 총 11개의 메뉴에 걸쳐 반전된 세계의 논리를 펼친다.
이 회사는 단단한 물질 위에 군림하고 통제하기보다는 그 흐름으로부터 배우고, 건물
곳곳을 직접 만지는 말단 직원이 오히려 회사의 주인으로 등극하며, 물질 파편들의 조합이 곧 임원진의
실체를 구성한다.

박보마, 〈러브레터 전단지〉, 2020, 디지털 프린트, 140x210mm ©박보마
견고한 콘크리트 바닥과 기둥 대신 투명하고 조각난 이미지로 가설된 이 회사는 수익구조와 실물 건물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재하지만, 과잉된 감각의 형태로써 그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로써 감각을 불신하는 이성중심주의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것과 ‘가짜’라고
폄훼하는 것, 시장 경제에서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위계에 균열을 내어 지배적인
가치에 의해 배제된 물질과 비로소 마주하도록 한다.

《물질의 의식》 전시 전경(리움미술관, 2023) ©박보마
그리고 2023년 개인전 《물질의 의식》에서 가상 회사 Sophie Etulips Xylang Co.,는 리움미술관의 휴게 공간인 로비 ROOM을 잠시 점유하여 이곳을 회사의 리셉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고층
빌딩에서 볼 수 있는 대형 유리 파사드와 대리석처럼 위엄을 드러내는 자재는 이곳에서 한층 가볍고 하찮은 물질로 대체되었다.
작가는 회사 로비에 있을 법한 대리석 이미지를 유화로 그린 페인팅 작업을 시트지로 제작해 공간 곳곳의 기물과
시설물 표면을 덮었다.

이곳에 걸려 있는 임원진들의 초상은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실루엣으로 나타났다. 초상 주변으로 조명이 설치됨에 따라 마치 실제로 그 뒤편에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는 듯한 환영을 자아낸다.
그리고 초상 주변은 제단처럼 조성되어 있었으며, 그 주위 산발적으로
배치된 오브제들(가짜 꽃, 회사의 가짜 화폐, 싸구려 장신구에 쓰일 법한 플라스틱, 석고로 만든 담배꽁초 등)은 망각의 영역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애도하고 있었다.

박보마, 〈오페라: 하늘색 무한 카논〉, 2023, 퍼포먼스 ©박보마
미세하게 떨리는 벽의 진동, 은은하게 스미는 향과 공중을 누비는 모호한
사운드는 발언권 없는 가변적인 물질을 주요 등장인물로 내세운다. 이처럼 반전된 회사에서 치르는 물질의
의식(ritual of matter)은 시장체제에서 무가치하다고 치부된 물질이 오히려 풍성한 존재감을
드러내도록 한다.

아울러, 전시와 함께 진행된 퍼포먼스 〈오페라: 하늘색 무한 카논〉은 물질의 의식을 미술관 로비 공간으로 확장했다. 이
공연은 퍼포머가 매개하는 정념, 망각된 물질을 애도하는 소리, 미술관
안팎을 돌보는 직원의 행위로 로비를 재조직하여 견고한 것과 흐르는 것이 구별 없이 서로 공명하는 상태를 연출한다.

이처럼 박보마는 하찮게 여겨져 쉽게 소모되어 버리거나, 금새 사라져
버리는 것들, 빛처럼 선명히 감각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작업으로 옮기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고, 페르소나를 통해 허구에 신체를 부여하거나, 웹사이트와
같은 가상의 공간을 통해 실체가 보이지 않는 내러티브를 펼쳐 나가기도 한다.
그의 작업은 자본과 사회가 구획하는 가치 체계를 교란시키고 뒤엎는 방식으로써 소외되고 사라져 가는 존재들에 감각적
실체를 부여하고 이들의 존재를 조명하며 위로한다.
”저라는 미디움을
통해서 소위 가짜라고 불리는 것들의 권위가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박보마, 비평가 양효실과의 인터뷰 중)

박보마 작가 ©Meet Your Artwork Festival 2024
박보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를 졸업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물질의 의식》(리움미술관, 서울, 2023), 《Baby》(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3), 《자비: 페인팅과 물질들 19xx-2022》(YPC SPACE, 서울, 2022), 《Sophie Etulips Xylang Co.,》(온라인, 2021), 《유리 에메랄드 프리오픈, 화이트의 가짜 노력》(아카이브 봄, 서울, 2017)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The Edge of Belongings》(Hessel Museum, 뉴욕, 2025), 《MMCA 다원예술: 쇼케이스》(MMCA/
아트 허브 코펜하겐, 2024/ 2025), 《즐겁게! 기쁘게!》(아트선재센터, 서울, 2023), 《Defense: …》(d/p, 서울, 2020), 《Shame
on You》(두산갤러리 뉴욕, 뉴욕, 2017), 《실키 네이비 스킨》(인사미술공간, 서울 2016)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References
- 박보마, Boma Pak (Artist Website)
- SEMINAR, 박보마 - 추상 인정 물질 볼륨 기분 필터 환원
- 아트바바, [서문] s-e-x-co.com – Sohpie Etulips Xylang Co., (Artbava, [Preface] s-e-x-co.com – Sohpie Etulips Xylang Co.,
- 갤러리SP, [전시 개요] Rebercca လက် and The Cost (Gallery SP, [Exhibition Overview] Rebercca လက် and The Cost)
- 이연숙(리타), 검은 거울: 박보마의 ‘분위기’에 대한 예비적 연구
- 리움미술관, [서문] 물질의 의식 (Leeum Museum of Art, [Preface] Ritual of Matter)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문] Baby (Project Space Sarubia, [Preface] Baby)
- 양효실, 박보마 인터뷰 (Interview by Hyosil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