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가영(b. 1985)은 스크린을 경계로 온·오프라인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화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여 게임과 미술에 접목한 형태의 작품을
제작해 왔다. 그의 작업은 게임의 상호작용을 이용한 미디어 작업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를 통한 작가의 핵심 질문은 게임이라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여성이 겪는 경험을 비롯한 불균형한 현실의 다양한
문제들과 그 대안의 모색에 있다.
작가는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게임적 세계관, 혹은 스토리텔링의 차원을
각색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며 대안적인 서사를 구축해 낸다.

안가영의 작업은 게임엔진이라는 기술적 요소를 통해 구축된 가상 세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여러 게임적 장치로 얽혀 있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관객이 직접 그 안을 탐험해 가며 작업이 전개된다. 이와 같은 작업의 방식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헤르메스의 상자〉(2016)는, 정보 전달의 신 헤르메스의 시점을 통해 기묘한 상자를 운반하는 게임이다.
주인공 시점의 게임 플레이어가 된 관객은 직접 조이스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각종 바이러스와 오류가 난무하는 네트워크의
미로 속을 탐색하게 된다. 헤르메스가 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 안에 숨겨진 3개의 상자 아이템을 수집하는 것이다.

또한 관객은 온라인 게임뿐 아니라 아날로그 게임을 통해 헤르메스가 미로의 출구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미션을
수행할 수 있다. 실물의 상자를 들고 전시 공간을 돌아다니면 센서에 의해 포착된 관객의 움직임이 화면
속 지형을 변형시킨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미션을 수행하고 마침내 미로에서 빠져나온 순간, 헤르메스는
해시(#) 여신에게 도착해 상자를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상자의 내용물은 미로를 헤매는 과정에서 각종 인터넷 루머들로 변해버리고 만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인터넷 네트워크 안에서 정보가 변형되고 전파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온라인 네트워크 안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소소한 행위들이 데이터의 형태로 전환되어 또 다른 빅테이터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안가영은 〈헤르메스의 상자〉를 통해 실제 사건과 데이터화된 텍스트와 이미지가 중첩된 오늘날의 복잡한 레이어들이
상호 침투하는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관객이 정보가 변형되는 과정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인터넷 네트워크의 씁쓸한 현실을 재현한다.

2018년에 발표한 〈월딩〉에서 작가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공존을
모색하는 ‘세계 짓기’라는 테마를 환상적인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풀어나갔다. 이 게임 작업은 시선의 힘에 따라 변화하는 인공 환경 속 생태계의 균형을 실험하는 게임이다. 땅속에 박혀 있는 미물이었던 캐릭터들은 서로 간의 관점을 바꾸어 가며 대화를 나누고 진화하거나 도태되면서 창발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제목인 ‘월딩(Worlding)’은
세계를 의미하는 단어 ‘World’에 접미사 ‘ing’를
붙인 단어로, 멈춰 있는 세계가 아닌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생성해 나가는 세계를 시사한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월딩〉은 이성보다는 감성, 경쟁과 성장보다는 공존, 고정된 상태가 아닌 예측 불가능한 상황, 강력한 영웅의 존재보다는 작은 행위자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상황들에 주목한다.
플레이어인 관객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규칙을 터득하고 세계의 균형을 맞추어 나가게 된다. 일시적이면서 열린 결말을 가진 〈월딩〉은, 관객의 자유로운 길찾기와
탐색을 허용하며 이를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생성해 나갈 수 있도록 한다.

이후 안가영은 페미니즘 스터디 모임 labB를 통해 작성한 텍스트
「21C 사이버 신체 해방 선언」(2019)을 바탕으로 한
영상 작품 〈21세기 사이버 신체 해방 선언〉(2020)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가상 공간에서 신체의 해방을 꿈꾸었던 9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이상이 오늘날에도 유효한지 묻는다
작업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에 따르면, 이 물음의 대답은 다소 회의적이다. 작가는 과거 자유와 희망의 지대로 여겨졌던 가상 공간은 오늘날 우리의 얼굴과 신체, 표피, 행동, 소리, 텍스트, 개인 정보 등을 비롯한 각종 부분을 나열시키고 욕망의 대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안전한 탑이 무너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영상 작품 〈21세기 사이버 신체 해방 선언〉에서 안가영은 오늘날
오픈소스 사이트에 나열되어 욕망의 대상이 되어가는 게임의 캐릭터를 사이보그 좀비로 되살려 내어 가상 현실 속 신체의 해방을 꿈꾼다. 여기서 작가는 욕망 또는 관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비(非)주체적 플레이어들에게 기존 게임에서 수행되었던 보편적 행동들 외 예외적 코드와 방언들을 삽입시킨다.
가령 이 게임에서 안가영은 게릴라 걸스, 도나 해러웨이, VNS Matrix를 경유하여 제노 페미니즘과 여성 게임, 퀴어
게임 연구 등에서 발견한 단어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젠더 편향적인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는 주술을 걸어 놓는다. 이로써
행동과 명령어가 혼종적으로 뒤섞인 신체들은 수행적 행동역학을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지형을 가로지르고 정치적인 맥락을 갖게 된다.

한편 안가영이 2019년부터 업데이트 중인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는 사회문화, 과학기술, 그리고 예술과 삶의 경계에 있는 각기 다른 종들의 반려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는 SF월딩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과학기술이 초래한
아포칼립스적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가상의 세계에는 복제견 메이, 유행에 뒤쳐진 로봇 준, 피폭된 노동자 줄라이로 구성된 NPC(Non Player Character)가
살아가고 있으며, 관객은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게임을 전개해 나가게 된다.
안가영은 이러한 사회로부터 소외된 존재들이 플레이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많은 개입 없이도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설정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게임 ‘심즈(Sims)’를 모티프로 삼아 캐릭터들이 자유의지와 성향에 따라 움직이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작가는 일반적인 게임의 세계에서도, 현실에서도 ‘타자’로 밀려난 존재들의 삶을 중점적으로 조명하며 플레이어-관객들이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가령 플레이어-관객은 NPC들의 서사를 파악하며 이들 간의 관계 일부에 개입하고
행동 반응을 이끌어내어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이때 플레이어-관객의 개입은 다소 소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의 행동을 방해(문 닫기, 조각
깨기, 날씨 기계 조작하기, 공 숨기기)하거나 선물(햄버거, 사료캔, 메모리칩 등)을 하면서 NPC들과의
친밀도를 조금씩 조정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NPC들과
친족이 될 수도 또는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으며 각기 다른 결말을 얻게 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안가영은 오늘날 디지털 생태계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게임 캐릭터로 대변되는 타종족들과 어떻게
반려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결국 이 게임에서 관객에게 주어진 과제는 “쉘터의 방문자로서 NPC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자율적 삶을 존중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다.

2022년 코리아나미술관의 연구 프로젝트 *c-lab 6.0에 참여한 안가영은,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외계 공진화
테스트〉(2022)와 오프라인 XR(혼합현실) 기술을 활용한 관객참여형 작업 〈우주감각: 미래 인류를 위한 XR 시뮬레이션〉(2022)을 선보였다.
먼저 〈외계 공진화 테스트〉는 웹기반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으로, 참여자의
기술 의존도를 묻는 간단한 설문을 통해 총 16개의 더미 로봇 캐릭터 중 자신의 유형이 반영된 1개의 캐릭터를 부여 받게 된다. 이 더미 로봇 캐릭터들은 ‘히온’ 행성의 테라포밍을 위해 인류보다 먼저 보낸 안드로이드 로봇들이며, 이들은 300년 후 정착에 성공하며 행성의 환경에 따라 그 역할과
생김새가 분화하는 설정을 지닌다.

한편 〈우주감각: 미래 인류를 위한 XR 시뮬레이션〉은 관객들을 가상의 외계 행성 ‘히온’으로 가는 승객으로서 우주 유영을 체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XR 퍼포먼스
작업이다. 관객들은 직접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지구 유사 행성 ‘히온’에
이주한 미래종에 대한 작가의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며 약 10분 동안 퍼포먼스에 참여할 수 있다.
VR 기기를 통해 펼쳐지는 풍경은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과 더불어 인간이
버린 쓰레기에 둘러싸인 지구, 우주 개발을 위해 희생된 동물의 별자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관객은 체험이 끝난 후, 자신이 밟고 있는 바닥이 충전재, 비닐, 폐전선, 택배
봉투 등으로 채워진 것을 알게 된다.

〈우주감각: 미래 인류를 위한 XR
시뮬레이션〉은 SF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메타버스에 대한 과열된 분위기, 급속도로 변화하는 기술, 모든 종을 절멸로 이끌고 있는 자본주의와
가속주의 등 동시대의 시급한 문제들을 가시화한다. VR 영상 속 온전하게 구현되지 않은 불완전한 신체와
관객이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실제 자신의 모습은, 자신과 타자, 기술, 그리고 세계와 공진화하기 위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준비 되어 있는지 질문하고 사유해볼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안가영은 관객이 직접 시뮬레이션 하며 체험할 수 있는 게임의 방식을 통해 다양한 존재들 간의 공존에 대해
성찰하고 상상한다. 작가는 자신이 구축한 가상 세계에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 모두에서 ‘타자’로 여겨지는 존재들을 가상의 신체로 소환하고, 이들을 현재의 담론 속에 재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서사를 부여한다. 가속화된
기술의 진보와 맞물려 나타나는 현실의 문제들을 녹여 낸 그의 작업은, 단순히 현실과 분리된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시뮬레이션으로 여기며 거리두기를 할 수 없게 한다.
즉 안가영은 작품을 통해 SF적인 세계관을 그리면서도, 이를 시뮬레이션 하며 과연 우리는 다양한 종들이 삶을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공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관객의 참여를
통해 시뮬레이션이라는 게임의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어떠한 결과를 얻는지가 중요하다. 시뮬레이션의 미학은
단일한 스토리 구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성향에 따라 갈림길을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이 다양한 사건들을 발생시키고 결말을 만들어 나간다는
지점에 있다. 그렇기에 작가의 역할은 시스템 환경을 조성하고 관객이 캐릭터로서 그 안에 던져 지게끔
만드는 것이다.” (안가영, 수원시립미술관 《당신의 하루를 환영합니다》
작가 인터뷰 중)

안가영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안가영은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을 전공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우주감각: 미래
인류를 위한 XR 시뮬레이션》(코리아나미술관, 서울, 2022), 《이리듐 에이지: 새 친족 만들기》(성북어린이미술관,
서울, 2021), 《KIN거운 생활》(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대전,
2019), 《느슨한 공간이동술》(아트스페이스 갤러리 정미소, 서울, 2016)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3),
디지털 아트 페스티벌 타이페이 2023 《A-Real
Engine》(디지털 아트 센터, 타이페이, 2023), 《Future Fantastic》(아트센터 나비, 서울, 2022),
《당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경기도미술관, 안산, 2022), 《오노프ONOOOFF》(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21),
광주미디어아트페스티벌 《알고리즘 소사이어티》(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8)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안가영은 2025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등에 입주 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그의 작품은 대전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서서울미술관, 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
- 안가영, An Gayoung (Artist Website)
- 한국연구, 안가영론: 세계라는 ‘그릇’과 ‘길’을 잃으며 찾는 플레이어들 / 오영진, 2023.09.12
- 디자인정글, 문래예술공장, 안가영 개인전 '헤르메스의 상자', 2016.09.26
- 더스트림, 21C CYBER BODY LIBERATION MANIFESTO, 2022.09.04
-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KIN거운 생활 (Artist Residency Temi, KIN in the shelter)
- 코리아나미술관, *c-lab 6.0 프로젝트 X 안가영 “우주감각: 미래 인류를 위한 XR 시뮬레이션” (Coreana Museum of Art, *c-lab 6.0 project X An Gayoung “COSMIC SENSE: XR Simulation for Humankind of the Future”)
- 수원시립미술관, “당신의 하루를 환영합니다” 작가 인터뷰 – 안가영 (Suwon Museum of Art, “Welcome, you connected!” Artist Interview – An Ga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