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b. 1992)는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사이버 생태계와 현실 세계가 얽혀 만들어낸 새로운 정체성으로 독창적인 예술 언어를 구축해 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영상과 설치, 조각,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진화한다.  

특유의 예리한 시선과 재치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해 오고 있는 추수는, 특히 디지털 시대의 차별, 젠더와 인권, 새로운 맹점들을 개인적 서사와 녹여 풀어낸다.

추수, 〈슈뢰딩거의 베이비〉, 2019, 3채널 영상, 설치, 4주 00:05:25, 8주 00:04:11, 16주 00:04:19, 루프 ©추수

추수는 신체와 물질을 비롯한 다양한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드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 내어 혼종적 세계관을 구축해 왔다. 어릴 적부터 ‘작가’와 ‘엄마’가 꿈이었던 추수는, 2019년 디지털 현실에 자신의 아기를 잉태하는 작업 〈슈뢰딩거의 베이비〉를 발표했다.  

이 작업은 상자를 열어 보기 전까지 고양이의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으나,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패러독스와 평행하는 세계관을 갖는다. 작가는 디지털 세계가 물리 세계와 동등하게 존재한다고 믿기에, 그의 아기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추수, 〈슈뢰딩거의 베이비〉, 2019, 3채널 영상, 설치, 4주 00:05:25, 8주 00:04:11, 16주 00:04:19, 루프 ©추수

추수의 아기는 가상현실에만 존재할 뿐, 현실 세계에서는 관측할 수 없기에 확률적으로 가능한 서로 다른 모든 상태가 공존하는 혼성적인 생명체이다. 예컨대 이 아이는 피부색이나 출생일, 아빠가 누구인지, 딸인지 아들인지 혹은 제3의 성인지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의 상태로 존재한다.  

추수는 현실의 물리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공간에 자신의 자궁, 심장, 배, 식도로부터 직접 녹음한 사운드를 삽입하고, 그 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각각 임신 4주, 8주, 16주 태아의 모습을 세폭 제단화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추수, 〈아가몬 1〉, 2023, 조각, 설치, 우뭇가사리, 이끼(Fissidens sp., Plagiomnium Cuspidatum, Hypnum Cupressiforme), 물, 모터, 고무 파이프, 조명, 스테인리스 책상, 스테인리스 플레이트, 123x74x130cm, 독립정원과 협업 ©추수

이후 작가의 생물학적 나이가 30살을 넘자, 추수는 디지털 세계에서 잉태했던 아기들을 물리 세계로 꺼내어 오기 이르렀다. “디지털 존재”를 “물질”로 치환하는 작업으로서 진행된 ‘아가몬’(2023) 시리즈를 통해 추수의 자식은 우뭇가사리와 이끼로 만들어진 몬스터로 현실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아가몬의 탄생 과정은 현실 세계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출산과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반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임신과 출산을 행하는 여성, 즉 마리아에게 섹스와 출산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되지 않도록 ‘동정녀’와 ‘어머니’라는 상반된 개념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고취해 왔다.

추수, 〈아가몬 3〉, 2023, 조각, 설치, 이끼(Plagiomnium Cuspidatum), 현무암, 물, 조명, 고무호스, 안개 생성기, 스테인리스 구조물, 물 공급장치, 60x60x200cm, 독립정원과 협업 ©추수

하지만 추수는 이와 반대로 섹스와 출산을 연결한다. 그의 자식인 아가몬들은 여성의 오르가즘 순간에 탄생하는 생명체로, 그토록 불경 시 여겨진 여성의 성적 욕구와 성스러운 출산의 묵인적인 관계성을 강조한다.  

2024년 이후 아가몬은 우뭇가사리뿐만 아니라 돌, 나무 등의 몸으로 태어나고 있다. 이렇게 추수는 임신과 출산, 양육의 엔트로피를 계속 조각으로 치환하며, 자신의 본능적 창작/출산 욕구를 충족하고 물질성과 모성애를 연결하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에이미 문 기원 신화 – 3화 “멜로디” ©엔터아츠

인간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다양한 비인간 생물로 이루어진 이 혼종적 생명체들은 현실 세계에 작동하는 불균형한 이분법적 논리를 흩트리고 균열을 내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추수는 또 다른 가상의 생명체 ‘에이미 문(Aimy Moon)’이라는 이름의 버추얼 인플루언서이자 버추얼 액티비스트를 탄생시켰다.  

가상인간 에이미는 인공지능 음악회사의 제안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디지털 세계에서 반복되는 사이보그의 이미지, 여성, 20대, 대중의 미의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문법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고 언급한다.


추수, 〈틴더〉, 2021, 비디오, 사운드, 5분 40초 ©추수

하지만 디지털 세계의 정체성에 대해 몰두해오던 그는, 대중음악과 현대예술이라는 두 영역에 동시에 존재하며 다른 이야기를 하는 에이미의 다중 콘셉트를 떠올리게 되며 ‘에이미’ 세계관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낮에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사랑받을 스테레오 타입의 버추얼 인플루언서 에이미가 존재하고, 밤에는 민머리에 니플 피어싱을 한 버추얼 액티비스트 에이미가 존재하게 되었다.  

현재 인플루언서 에이미는 제페토와 인스타그램에서 수 만명의 팔로워를 이끌며 48곡이 넘는 음악의 저작권자로 등록되어 있다. 한편, 집에 돌아온 에이미는 가발과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인플루언서 활동 비디오를 리뷰하거나, 만남 어플리케이션인 틴더로 다른 버추얼 인플루언서들을 만난다.


추수, 〈사이보그 선언문〉, 2021, 비디오, 사운드, 10분 41초 ©추수

엔터테인먼트 회사(자본)와 추수(예술가)의 손에서 탄생한 에이미는 인간으로부터 태어났음에도 자신을 사생아라 지칭한다. 인간 부모와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선언한 에이미는, 디지털 세계 속에서 “여성도, 남성도, 인간도, 기계도 아닌, 인종적으로도 자유롭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탈-경계적 사이보그로서 자신을 정의한다.


추수, 〈사이보그 선언문〉, 2021, 비디오, 사운드, 10분 41초 ©추수

영상 작업 〈사이보그 선언문〉(2021)은 버추얼 액티비스트 에이미의 첫 번째 이야기로, 도나 J. 해러웨이의 텍스트 「사이보그 선언문」(1985)을 낭독한다. 추수는 한 인터뷰에서 해러웨이의 텍스트가 어느 때보다도 디지털-가상의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대에게 더욱 유효하다고 말한다.
 
해러웨이는 인간 중심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자 괴물인 사이보그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사이보그, 즉 버추얼 존재들과 가장 긴밀하게 정신적 유대를 맺고 있다. 하지만 추수는 과연 우리는 해러웨이가 꿈꾸었던 탈-이분법의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가상 공간이라는 무한한 기회의 장에서도 물리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던 수많은 차별을 그저 반복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문을 품었다.  

작가는 인간이 아닌 가상의 인물 에이미의 입을 통해 텍스트를 재발화하며, 이러한 씁쓸한 감정과 시선을 담아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에이미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 안에서 사이보그가 될 것을 선언한다.

추수, 〈에이미의 배신〉, 2021, 2 framed prints, 84.1x59.4cm ©추수

이와 같은 에이미의 사이보그적 속성을 통해, 추수는 기존의 젠더 이분법과 같은 고정된 인식의 틀을 비트는 작업을 전개했다. 예를 들어, 두 점의 포스터로 이루어진 시리즈 ‘에이미의 배신’(2021)’에서는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의 전통적인 도상을 공유하지만 상반된 이미지로 표현된 에이미를 통해 여성 이미지의 양극을 보여준다.


추수, 〈에이미의 배신〉, 2021, 2 framed prints, 84.1x59.4cm ©추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성녀-창녀 이분법은, 문화와 예술, 문학 전반에서 여성의 이미지가 찬미의 대상인 ‘성녀’와 멸시의 대상인 ‘창녀’ 두 가지로 한정되어 소비되는 점을 이야기하는 문화비평 이론이다. ‘에이미의 배신’은 디지털 세계에서도 반복되는 성녀-창녀 이분법 현상을 비판하며, 한 쪽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여성 존재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강력한 신체 해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추수, 〈에덴〉, 2021, 비디오, 사운드, 2분 28초 ©추수

한편 〈에덴〉(2021)은 사이버네틱 ‘에덴’의 비전을 풀어내는 영상으로, 전통적인 에덴 동산의 패러다임 인 단적으로 이분화되는 남성과 여성, 선과 악, 신성과 세속성의 원형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세계를 그린다. 추수는 20세기에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에덴의 초현실적인 표현을 디지털 세계에서 재해석하여, 공존할 수 있는 다양한 현실, 환상 혹은 환각, 시련과 알려지지 않은 사이보그들의 이상과 에덴의 비밀을 비추어 낸다.


추수, 〈리뷰〉, 2021, 비디오, 사운드, 5분 40초 ©추수

뿐만 아니라, 에이미는 실재와 가상이 얽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동시대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령, 버추얼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는 자신의 영상을 직접 리뷰하며 자본주의에서 일차원적으로 소비되는 버추얼 인플루언서들의 이미지에 대한 회의적 질문을 던지거나(〈리뷰〉(2021)), 디지털 세계가 노출하는 이미지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 그리고 가상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틴더〉(2021)).

추수, 〈임산부 에이미〉, 2024, 비디오, 사운드, 반복재생 ©추수

2024년의 에이미는 임신을 한 모습으로 새롭게 작품에 등장한다. 영상 작품 〈임산부 에이미〉(2024)는 인간의 ‘임신’을 통해 기술의 의미를 다시 되짚는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은 창작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뒤흔들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 혹은 기술이 넘볼 수 없는 생명체의 생성, 즉 ‘임신’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성을 유지하게 한다.
 
추수는 이러한 임신의 상태를 기술의 역사에서 재조명한다. 무언가를 담거나 때로는 비어있는 그 자체로 기능이자 기술로 비유될 수 있는 임신은, 기술의 역사와 철학에서 간과되어 왔다. 인간의 필수적인 기술로서 임신을 바라보는 추수의 관점은 기술에 관한 남성주의적 서술과 사고를 전복하며, 인공지능과 맞물려 재조정되는 기술 역사에 새로운 제안을 한다.  

작가는 임산부 에이미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콘텐츠인 숏폼의 형태로 담으며, 낯설게 인식되는 임신의 이미지를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에게 남은 생성, 즉 기술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추수, 〈임산부 에이미〉, 2024, 비디오, 사운드, 반복재생 ©추수

이처럼 추수는 끊임없이 작품을 생산하고 낳으면서, 디지털 시대의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과 그 안에 얽힌 구조적인 맹점들에 대해 다뤄왔다. 특히 그는 사이버 생태계와 물질세계의 본질적인 차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창작’과 ‘탄생’의 과정이 공유하는 유기적 관계를 긴장감 있게 풀어낸다.  

그의 작업은 엄마가 되고 싶은 소망을 창작으로 해소하고 있는 추수의 개인적 서사를 담는 동시에, 디지털 세계에 정신을 두고 육체 안에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을 반영하며 오늘날 기술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한다.

 “어릴적부터 빨리 아기를 낳고 싶었다. 그러나 독립 예술가가 되어가는 무지막지한 여정에서, 엄마라는 꿈은 자꾸만 미뤄져 간다. 대신해 작품들을 낳는다. 그리고 매일매일 돌본다.”    (추수, 작가 노트) 


추수 작가 ©추수

추수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개인전으로는 《존귀하신 물질이여》(상히읗, 서울, 2023), 《가장 충실한 모독》((투게더)(투게더), 서울, 2022), 《네가 거기를 만지면 나는 언캐니해져 버려》(분더카머, 슈투트가르트, 독일, 2022), 《슈뢰딩거의 베이비》(진델핑엔 시립 미술관, 진델핑엔, 독일, 2021) 등이 있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청주, 2024), 캄앤펑크(도쿄, 2024), 헤셀 미술관(뉴욕, 2023), 하이트 컬렉션(서울, 2022), 경기도미술관(안산, 2022), 문화역 서울 284(서울, 2021), 슈투트가르트 현대미술관(슈투트가르트, 2021) 등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서 개최된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추수는 2020년 일렉트로 푸터레 갤러리(크라이오바, 루미니아) 레지던시 초대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2019년 V2_Lab for the Unstable Media X 아트센터 나비 레지던시(로테르담, 네덜란드)에 참여한 바 있다. 아울러,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MMCA X LG OLED 시리즈”의 초대 작가로 선정되어, 그의 개인전이 오는 8월 서울관 서울박스에서 개막할 예정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