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정(b. 1990)은 실재하는 풍경을 3D 렌더링 기반의 디지털 이미지로 재현하고, 이를 물리적 공간에 영상 및 설치로 구현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다층적인 미디어 실험을 포괄하는 그의 작업은, 실재와 가상 사이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과 기계, 자연의 관계를 살핀다.

구기정의 작업은 오늘날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왔다. 작가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손쉽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면서 더욱 긴밀해진 인간과 기술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주목해 왔다.
초기에는 ‘증강된 현실성’과
미디어에 압도되어 이루어지는 소통의 오류를 주제로, 반복과 중첩을 통해 고유의 정체성(원본)을 상실해 나가는 과정을 복사기, 사진기, 구글 번역기 등이 기술로써 실험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자 미상의 이미지를 재추적하는 측정도구를 만들어,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힌 정보 속에서 스스로 기준을 찾기 위한 시도를 지속해 왔다.

이와 함께 구기정은 인간의 지각 방식이 기술의 합리성과 효율성에 기대며 변화해 온 반면, 모호하고 불확실한 정보를 다루는 데에는 점차 낯설어지는 현상에 주목했다.
모호함에 대한 문제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오늘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라 본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연출된 환경 속에서 관람자가 능동적으로 경험하고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작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구기정은 육안으로 쉽게 들여다 볼 수 없는 상황을 관찰하고자 개발된 디지털 카메라와 3D 그래픽 도구를 작업에 활용한다. 그의 작업에서 자연의 이미지는
디지털 기술로 가공되고, 비-실제적 자연과 접목되어 관람자의
눈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렌더링 된 자연〉(2019)은
디지털 환경 속 인간의 경험을 다룬다. 컴퓨터 그래픽처럼 선명한 무늬를 가진 실제 식물과 CGI가 뒤섞인 식물의 이미지를 병치한 이 작업은, 오묘함을 불러일으키며
관람자가 이미지를 확인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람자는 주변에
설치된 네온 불빛들의 불편한 간섭을 받게 된다.

이처럼 구기정의 작업은 순수한 자연의 풍경을 기술로 재현하는 것보다는 자연과 기술이 혼재된 오늘날의 환경에서
인간의 분별과 이해가 뒤섞인 경험을 재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가는 2020년 N/A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Defaulted》에서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보는 세상의 이미지가 디지털 기술의 정교한
개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드러냈다.

전시 내 작품들은 2차원 이미지의 결점을 주변 이미지의 데이터를 이용해
매끄럽게 없애 주는 내용 인식 채우기(Content Aware Fill) 기술과 3차원 모델을 렌더링할 때 물체의 높낮이를 흔들어 질감을 만드는 범프 대응(Bump
Mapping) 기술 등을 이용하여 기술이 개입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전시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보여지는 가상 세계와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실재 세계 사이의 차이를 다룬 영상 작품을
시작으로, 실제 사진과 이미지 소프트웨어 기능을 중첩하여 제작된 증강된 세상의 모습을 월페이퍼와 액자를
통해 공간적 차원으로 설치하여 몰입적인 체험을 가능케 했다.

2021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융복합 페스티벌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에서 선보인 〈유명한 풍경〉(2021)은 기술에 압도되어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을 포착하고 이를
다양한 매체로 표현하여 오늘날 다양한 기기로 재현되는 복잡한 풍경을 보여준다.
구기정은 작업을 위해 스위스의 도시 호슈(Roche)에서 몰입된 풍경을
촬영한 다음, 촬영된 자연 이미지를 생생하게 재현할 때 주로 사용되는 2D-3D 기술을 혼합, 활용하여 재생산했다.

작가는 이러한 디지털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기술적 특징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노이즈 감소(Noise Reduction), 범프 대응(Bump Mapping) 같은
효과를 반복 작업하며 이미지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쾌한 골짜기
효과는 관람자로 하여금 더 오랫동안 이미지를 관찰하고, 그 사실성을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한다.
이와 더불어, 구기정은 실재-가상
물질(흙과 나뭇가지-디지털 사진)과 정적-동적 이미지(프린트한
스틸 이미지-모니터 속 상영되는 영상)로 만든 환경을 연출하며, 관람자의 신체 움직임을 통해 다양한 관점으로 이미지가 확장될 수 있도록 했다.

기술-미디어와 인간의 신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Contrology〉(2022)을 통해 더욱 본격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작품은 미디어가 주입하는 신체의 이미지와, 미디어 기기를 통해 신체 경험이 만든 경직되고 어긋난 인간의 신체를 동시에 비판하며 ‘이미지의 불균형’을 퍼포먼스 영상과 설치로 구현하고 있다.

관람자는 영상 속 퍼포머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미디어 환경에 체화된 자신의 경직된 몸을 재감각하고 뒤척이게 된다. 문현정 큐레이터는 이에 대해 “관객에게 강화된 시각 자극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화면 속의 대상에 자신의 신체를 이입하여 직접 몸을 움직일 것을 촉구하는 선전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디지털 미디어가 인간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작가의 포괄적인
질문은 작업을 통해 관람자의 신체로 도달하게 된다.

한편 구기정은 〈미세기계생명배양장치〉(2024)를 통해 도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자연과 고립된 상태에서 자연에 쓸모 있는 인간으로 남으며 자연에 영감 받는 태도를 지속할 수 있을지, 몸의 이동 없이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 작업은 도심 속 건물 안 좁은 스튜디오에서 반려 식물(비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작가의 지인(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구기정은 반려 식물을 촬영하고
3D 스캔한 다음, 고화질 데이터를 수집해 이미지를 제작하고
티비와 구조물 이미지를 실제 화면 안에 액자식으로 배치했다.

실재-가상 이미지가 병치된 작업은 관람자의 명상적인 몰입을 유도하고, 디지털 기기나 인간공학적 디자인과 같이 도시에서 주어진 것들로 순환하고 명상적인 대자연을 경험하는 것 사이의
간극에 대해 질문하며 가장 도시적인 방식으로 디지털 자연을 해체하고, 또 구성한다.

이처럼 구기정의 작업은 디지털 기술로 가공된 실재의 풍경을 통해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위치한 모호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오늘날 디지털 기술에 체화된 인간의 신체적 감각에 주목하며 몰입적 체험을 연출해 온 그의 작업은, 관람자의 몸을 통해 실재와 가상 사이의 모호한 지점을 감각하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이 이미지가 실재를 가져온 것인지 혹은 그래픽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재 같은 것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헷갈림 속에서 관람객이 이미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본인의 인식이나 기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길 바란다.” (구기정, 서울시립미술관 《SeMA 앤솔러지:
열 개의 주문》 작가 인터뷰)

구기정 작가 ©구기정
구기정은 홍익대학교 조형대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에칼/로잔예술대학교에서
사진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Route 0》(서호미술관, 남양주, 2024), 《초과된
풍경》(광화문 광장, 서울,
2023), 《Contrology》(Hall1, 서울, 2022), 《Defaulted》(N/A,
서울, 2020)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작가는 《끝없이 갈라지는 세계의 끝에서》(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24), 몰타 비엔날레 주제관 《Hybrid Landscape is Isolated》(National
Museum of Archaeology, 발레타, 2024), 《SeMA 앤솔러지: 열 개의 주문》(북서울미술관, 서울, 2023), 더치 디자인 위크 《Get Set》(Strijp-T, 아인트호벤, 2022),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아르코미술관, 서울, 2021), 파리 포토 《Mirage
Club》(24 Rue Beaubourg, 파리,
2018)등에 참여하며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구기정은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2024) 및 제로원
현대 모터스 크리에이터(2025)로 활동하였으며, 몰타비엔날레
주제관 선정 작가(2024) 및 현대 퓨처넷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 공모(2024)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
- 구기정, Gijeong Goo (Artist Website)
- 비애티튜드, 3D로 빚어낸 불확실성의 세계
- 라라앤, <ㄷ ㄷ ㄷ> 작고 소개 – 구기정, 2021.07.02
- N/A, Defaulted
- 문현정, 구기정 개인전 ‘Contrology’ 비평글 - 미디어 문법, 응고된 신체를 자각하기 위한 장으로서의 Contrology
- 서울시립미술관, SeMA 옴니버스 《끝없이 갈라지는 세계의 끝에서》 - 구기정, 〈미세기계생명배양장치〉 (Seoul Museum of Art, SeMA SeMA Omnibus : At the End of the World Split Endlessly - Gijeong Goo, MACROMACHINEPLANTINCUBA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