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미술 시장이 점진적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가운데, 한국 미술 경매 시장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급격한 하락세를 기록했다. 단순한 거래 위축을 넘어, ‘가치의 재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KAAAI) 홈페이지 캡처화면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KAAAI)가 발표한 ‘2025년 1분기 국내외 미술시장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주요 9개 경매사의 낙찰총액(수수료 제외)은 약 261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1.8% 감소했다. 특히 상징적으로 중요한 10억 원 이상 낙찰작이 한 점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재 시장의 위축은 단기적인 침체 이상의 신호로 해석된다.

출품 수, 평균 낙찰가, 낙찰률 등 주요 지표들도 일제히 하락세를 보이며, 경매 시장 전반의 구조적 리셋이 진행 중임을 암시하고 있다.



거시경제 악재와 투자심리 위축… 단순 경기 순환이 아닌 전환의 시기

KAAAI는 이 같은 시장 급락의 배경에 국내외 거시경제 상황과 정치적 불확실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한국은행은 최근 2025년 국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6~1.7%로 하향 조정했으며, 지난해 12월 발생한 정치적 불안정이 전반적인 투자심리를 위축시켰고, 이는 미술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번 하락은 단순한 경기 사이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미술 시장 내부의 가치 판단 기준과 참여자들의 태도 자체가 바뀌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서울옥션 ‘급락’, 케이옥션 ‘반등’… 시장의 양극화 현상

(좌)서울옥션 사옥 (우)케이옥션 사옥 전경

경매사별로 실적은 뚜렷한 양극화를 보였다. 서울옥션은 낙찰총액이 209억 원에서 89억 원으로 57.1% 급감했으며, 오프라인 경매 횟수는 3회에서 1회로 줄었다. 오프라인 낙찰액은 무려 80% 이상 감소했다.

반면 케이옥션은 132억 원의 낙찰총액을 기록하며 12.9% 상승했다. 낙찰 수는 줄었지만, 평균 낙찰가가 약 2.3배 상승하며 실적을 견인했다. 아이옥션도 16.4% 증가한 9억 원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마이아트옥션(-32.1%), 에이옥션(-27.8%), 칸옥션(-32.5%) 등 중소형 경매사는 대부분 하락세를 피하지 못했다.

전체 낙찰률은 49.8%로 전년(50.8%)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서울옥션(51.8%)과 케이옥션(49.6%)은 소폭 상승했으나, 마이아트옥션은 38.0%로 급락했다. 칸옥션은 66.7%로 가장 높은 낙찰률을 기록했다.

케이옥션의 평균 낙찰가는 1,255만 원에서 2,881만 원으로 급등했으며, 마이아트옥션도 상승세를 보였다. 반면 서울옥션은 3,485만 원에서 1,305만 원으로 급락, 상징적인 타격을 입었다.



글로벌 옥션 시장은 완만한 하락세… 회복의 초기 신호인가

글로벌 주요 경매사 전경. (좌)크리스티 뉴욕, (중)소더비 뉴욕, (우)필립스 뉴욕

글로벌 주요 경매사인 크리스티, 소더비, 필립스의 2025년 1분기 총 낙찰총액은 약 10억 3,0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4.1% 감소했다. 이는 2016년 이후 두 번째로 낮은 분기 실적이지만, 하락 폭이 줄어들며 “바닥을 다지는 국면”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낙찰 건수는 17,872건에서 20,954건으로 17.2% 증가했다. 이는 글로벌 미술 시장의 유동성이 점진적으로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다만 온라인 경매 부문에서는 오히려 거래량이 줄며 디지털 플랫폼의 확장성 한계를 드러냈다.


 
경매는 이제 ‘가치 설계 플랫폼’으로 진화 중

국제 경매사는 단순한 유통 채널을 넘어, 예술의 의미를 설계하고 가치를 재정의하는 문화 주체로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소더비는 베니스 비엔날레 작가를 후원하거나 아트바젤 기간 전시를 기획하는 등, ‘예술적 맥락’ 중심의 활동을 통해 시장가치를 설계하고 있다.

이는 단순 시장 논리를 넘어, 제도권 평가와 담론적 정당성에 기반한 장기적 가치 구축 전략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경매가 ‘판매’를 넘어 ‘전시와 해석’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가 거래는 줄었지만, 예술 향유는 여전히 활발

이번 분기 동안 수천만 원 이상의 거래는 줄었지만, 미술관과 전시장은 여전히 관람객으로 북적이고 있다. 대중의 예술 향유 열기는 여전히 뜨거우며, 단순한 투자나 소유를 넘어 ‘경험’으로서의 예술에 주목하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컬렉터들 역시 빠른 소비보다 신중하고 의미 중심적인 수집 태도로 전환하는 분위기다. 이는 시장 전반이 ‘가격’보다 ‘작품의 맥락과 가치’에 관심을 옮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정준모 대표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2025년의 미술 시장은 ‘최고가 경매’보다 ‘최고의 전시’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출품작을 단순 상품이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대우하고, 이를 미술관 수준의 전시로 구성하는 경매 전략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결국, 시장이 아닌 가치가 중심이 되는 구조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