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형(b. 1994)의 작업은 현실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증폭된 디스토피아적 미래로 풀어내는 동시에, 그 안에 잔망스러운 상상력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은 급진적인 기술의 발전, 무분별한 자본주의의 팽창, 인간 정체성의 파편화와 같은 우리 사회의 여러 난제들을 과장되고 왜곡시켜 아포칼립스적인 장면들로 묘사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멸망의 끝이 아닌, 해체와 파괴를 통한 새로운 질서와 연결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펼쳐진다.

한지형의 초기 연작 ‘Biodegradable Land’(2020)는
체코,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작업이다. 작가는 당시 각 나라마다 다른 관습과 전통, 언어의
진폭, 제스처 등의 다양성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그에 따라 자신 또한 다른 설정으로 재부팅이 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다양성 안에서 인간이자 한국인이라는 자신의 외부가 환경에 따라 새롭게 설정되는 경험은, 곧 그 안에 내재된 본성으로 만들어지는 외피에 대한 상상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Biodegradable Land’ 연작은 분해되거나 해체된 후 다시 태어나는
형상으로 새로운 신체를 표현하고 있다.

이 추상적 신체는 단단한 표면으로부터 벗어나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상태로, 새롭게 연결될 잠재성을 내재하고 있다. 한지형은 여럿이 모여 만들어지는 공동체를 하나의 생명으로 가정하고, 각각의 개별 주체들이 등장하면서 서로 조율하고 살아가는 하나의 작은 공동체이자 마을이 되는 추상 화면을 그려내고자 했다고 말한다.

한지형, 〈Fossilized Trees -i〉, 2021, 캔버스에 아크릴, 50x100cm ©한지형
한지형의 작업에서 주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신체성’이다. 그는 인간의 몸이라는 사회적이고 재현적인 구조 모델에 의문을
가지면서 신체가 지닌 개념을 재정립하고자 해왔다. 그에게 신체는 감각되는 활동의 부피와 사건의 장소이다. 그의 작업은 이러한 개인의 신체가 모여 인간 종으로 묶이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를 위해 한지형은 오늘날 디지털 환경과 관련된 새로운 영역, 자신의
정체성을 초월하려는 사람들, 돌연변이적 존재로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사람들 등 다양한 인간상에 주목한다.

2021년 N/A에서 열린 개인전 《identi-kit : The people’s choices》에서는 인간의 몸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과 함께 인간의 지성으로 해석되지 않는 또 다른 실체로서의 비인간 개념을 제시했다. 한지형은 전시실을 생체 분자 구조와 뉴런, 배아의 재생과 발생, 유전 공학 등으로 처리되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 형태와 이미지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종을 만드는 기업으로 상정했다.

그곳에서 인간은 생태계의 공생하는 존재자들 중 하나로서 자리하며, 단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복수로 이루어진 공동체와의 연결을 바탕으로 자아가 형성된다. 이러한 소셜 네트워크
개념 속에서 개인의 이미지는 여러 객체와의 사건과 경험을 거쳐 굴절되고 반사되며 지속적으로 변형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외양과 모습으로 결정되는 것들은 철저히 지워지게 되고 추상적인 형상만이 남게 된다.
경계로서의 외피를 걷어낸 개인의 이미지는 사건의 장소가 되는 신체를 공유하며 ‘우리’로 묶이는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다. 한지형이 제시하는 신체성은 우리를
유지하는 것들과 환경, 기술, 경계의 관념이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는 지금, 새로운 신체의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한다.

한지형의 회화는 무수한 정보와 이미지가 무작위로 교차하고 팽창하며 분열하는 현 시대를 재맥락화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추상화된 사회의 단면을 동결시켜 보여주는 동시에, 이후
도래할 미래로 향하는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비롯한 모든 이분법으로부터 초월한 상태로 제시되며,
환경에 따라 무한히 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들이 공생하는 공유지로서의 화면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내재한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한지형, 〈Manhattan_Guy〉,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45.5x112cm ©한지형
한지형은 디지털 기술이 제공한 각종 도구 상자를 활용해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과 인터넷에서 수집한 글과 이미지를
편집하고 콜라주한 다음, 완성된 이미지를 에어브러시로 캔버스에 구현한다. 에어브러시 기법을 통한 부드럽고 몽롱한 색감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물리적 세계의 규칙을 초월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흐릿해진 경계와 분산된 초점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흔들며, 유동적이고 재구성이 가능한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2023년 바이파운드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Them so good》에서는 젊음과 성 정체성이 지닌 이상으로부터 표출된 초현실적 이미지와 가상의 커뮤니티를
선보였다. 한지형은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사회적 아웃사이더의 원형으로부터 만들어진 개체를 다루며, 미래의 펫숍을 상정한 쇼룸의 형태로 전시를 꾸렸다.
작가는 그 안에 반인반수의 동반자 혹은 가상의 자아를 표현하는 ‘퍼리(furry)’의 초상화 이미지를 진열해 이념을 넘어선 다/초 차원적
경험과 새로운 삶의 형태를 판매하면서 ‘실재하지 않지만 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진열된 퍼리 초상화들은 무채색에 흐릿한 윤곽과 상실된 초점을 가지며 초상 속 퍼리의 정체가 모호하게 나타난다. 이 희미한 정체들은 동물과 인간의 외형이 혼재하고 젠더와 나이도 가늠하기 어려운 경계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전 작업 속 해체되고 융합된 신체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인간의
지성으로 인식되기 어려운 낯선 신체를 가진 주인공으로 화면 안에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이들을 “특정한 대명사가 되기를 저항하는 ‘거부하는 몸’”이라고 말한다.

〈Rave quotes and wisdom〉(2023)과 〈Egos slide into one another〉(2023)는 변장하기 혹은 변신하기와 같은 ‘애너모픽(anamorphic)’ 개념을 바탕으로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변형 또는 변신은 비판과 저항의 형태로서 단순한 욕망의 표현을 넘어 왜곡을 주도하는 인간의 의지와 욕망을 담은 개념이다.
이러한 돌연변이를 향한 의지는 육체성에 대해 재고하고 신체 미학과 이에 내포된 정치, 윤리와 얽힌 관계를 강조하는 도전이 된다. 한지형은 이처럼 분명하지
않은 정체를 지닌 이들이 지극히 정상인 세계를 그리며, 기존의 체제와 사유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2024년 제이슨 함에서 열린 개인전 《사치스런 뼈》에서는 다가올
2100년을 상상하며 그려낸 미래의 풍경들을 보여주었다.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미래를 예상하는 영화나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재난과 폐허의 이미지처럼 미래의 풍경을 디스토피아로 묘사하고 있다.
작가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은 그가 속한 세대와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비롯된다. 한지형은
디지털 세대로서 대중문화의 환경에서 자신의 취향을 배양해 온 동시에, 전쟁과 오락이 병존하는 동시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 존재의 폭력적 본질과 그에 대한 사회적 저항 등이 심화되고 확장된 미래의 음울한 전조들이
담겨있다. 그러한 분위기는 뒤틀리거나 변형된 신체의 빈번한 등장이나 파악하기 어려운 배경, 무겁고 비현실적인 색감 등으로 표현된다.

한지형, 〈침대 위의 점심식사〉, 2024, 캔버스에 아크릴, 120x178cm ©한지형
《사치스런 뼈》에서 등장하는 신체는 사회의 권력관계가 얽혀 나타나는 장소로 다루어진다. 작가는 이해나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빈번한 신체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 미래의 풍경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회화에서 변형된 신체들은 인간의 신체에 동물의 요소들이 가미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동물의 이미지는 동시대 상업자본을 배경으로 하는 캐릭터들을 참조로 한다.
그러한 캐릭터들이 얼굴을 대체하고 있는 신체 이미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어색한 세대가 사용하는
아바타나 밈을 연상케 하며, 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그려낼 미래의 풍경을 암시한다.

이처럼 한지형이 상상하는 미래는 현재 그가 경험하는 환경의 연장선에서 그려진다.
그가 파악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징후는 오늘날 일상을 점유하는 거대 자본의 글로벌한 플랫폼이 주도하는 왜곡된 신체성과 분열의 양상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지형은 폐허와 같은 미래를 그리면서도, 그 안에 모든 경계를
초월해 연결을 향해가는 이미지들을 등장시키며 낙관주의를 남겨놓는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실험이다.
”제 그림이 베일에 얇게 싸인 하나의 공간이라면, 그
문턱을 넘어 존재와 정체성의 과도기적 상태에서 구현되는 가능성을 들여다보길 바라며 작업하고 있어요. 내면과
외면, 은폐와 폭로 사이에 자리 잡은 인간의 의지와 의식이 제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깃들기를 소망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한지형, 비애티튜드 인터뷰 중 발췌)

한지형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조형예술과 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형예술과 평면매체 전공으로 예술전문사 학위를 취득했다. 갤러리 175(서울, 2020), N/A(서울, 2021), 드로잉룸(서울,
2022), 바이파운드리(서울, 2023), 제이슨
함(서울, 2024)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최근 참여한 단체전으로는 《Karma II》(Ground Floor, 9 Cork Street, 런던, 2025), 《Condo London 2025》(카를로스/이시카와 갤러리, 런던,
2025), 《끝없이 갈라지는 세계의 끝에서》(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24), 《기기 밖의 유령》(인천국제공항, 인천, 2024), 《BOLMETEUS》(SAI Gallery, 도쿄, 2024), 《K90-99》(LUPO
Gallery, 밀라노, 2023) 등이 있다.
서울, 도쿄, 뉴욕, 밀라노를 비롯한 국제 무대에서 활발하게 작품을 선보여 온 한지형은 지난 2023년
종근당 예술지상 올해의 작가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References
- 한지형, Jihyoung Han (Artist Website)
- 제이슨함, 한지형 (Jason Haam, Jihyoung Han)
- 올댓아트, [라이징 스타: 미술가 한지형] “안정적 미래보다 가슴 뛰게 만드는 꿈을 선택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2021.09.24
- 비애티튜드, 창작이라는 특권의 의무 – 한지형
- 다노마드, 한지형 작가 개인전 “identi-kit : The people’s choices”
- 드로잉룸, Fatty Folders (DrawingRoom, Fatty Folders)
- 파운드리 서울, Them so good (Foundry Seoul, Them so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