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아(b. 1987)의 작업은 일상적 경험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동양화의 표현 방식을 기반으로 한 그의 작업은 작가, 여성,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겪는 삶의 여러 변화 속에서 하나의
단어로 단순화되지 않는 복잡미묘한 정서와 기억을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조형 언어로 풀어낸다.

한상아, 〈낯선 파장 1〉, 2019, 광목천에 먹, 실, 170x230cm ©한상아
한상아의 작업은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수많은 감정의 편린들과 공상을 엮어 모아, 광목천 위에 먹으로 그려내면서 전개된다. 작업의 기반이 되는 동양화의
매체와 표현 방법은 다층적인 성질을 가짐으로써, 한상아가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와 닮아 있다.
동양에서의 ‘먹’은 현색(玄色)이라 하여 태양의 빛이 없어도 존재하는 우주의 본색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것이 지닌 농담의 차이는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수만가지 색을 의미한다.
한상아는 이처럼 단순한 검정이 아닌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먹은 작가 내면의 파장을 담기에 적합한 소재라고 설명한다.

《낯선 사이》 전시 전경(위켄드, 2018) ©한상아
또한, 먹은 다른 어떤 재료보다 물에 가장 신속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붓 끝의 움직임에 따라 먹은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광목천 위를 표류한다. 먹은 나아가려는 힘과 멈추려는 힘으로 특유의 진동, 파동을 만들며
물과 함께 떠돌다가 광목천에 정착한다. 그리고 그 천은 날카로운 것에는 연약하지만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엮인 질긴 재료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상아는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이 물성들을 토대로 작업을 이어간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불투명한 마음의 모양은, 뾰족한 붓끝에서
둥글게 번지며 외곽선을 가진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이는 이내 다른 화면 위에 겹쳐지는 얇은 조각이
된다. 작가는 흑백의 편린들 사이에 솜을 채워 넣고 실로 기워내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반복하며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세계를 직조해 나간다.

한상아, 〈낯선 사이〉(세부 이미지), 2018, 광목천에 먹, 혼합설치, 가변크기 ©한상아
그렇게 만들어진 작업은 다층의 먹으로 물든 작가의 서사와 감정, 그리고
공상이 혼재되어 낯선 풍경으로 나타나게 된다. 가령, 2018년
첫 개인전 《낯선 사이》(위켄드, 2018)에서 한상아는
임신을 하게 되며 경험한 기쁘지만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는 복잡 미묘한 심경을 표현했다.
지켜야 할 존재가 생기면서 생긴 감정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불길한 상상이나 일어나지 않은 재난에 대한 공상과
뒤섞이며 불안감을 드러내는 한편, 낭만적인 시각으로 표현된 장면들은 작가의 복잡 미묘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낯선 파동》 전시 전경(송은아트큐브, 2019) ©한상아
이듬해 열린 개인전 《낯선 파동》(송은아트큐브, 2019)에서는 작가의 삶에 크나큰 파동을 준 사건들을 은유와 공상이 혼재되고 조합된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풀어냈다. 예를 들어, 전시장을 둘러싼 〈낯선 파동1〉(2019)은 작가의 초기 작업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작가의
삶에 파장을 주었던 사건들, 이를 테면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작가만의 상징적인 기호들로 함축시켜 총 세 개의 구성으로 나누어진다.
큰 파동 없이 잔잔하게 오롯이 혼자였던 삶을 즐기던 시기부터,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맞이한 수많은 변화들과 그로 인해 형성된 어머니와 작가 본인, 그리고 작가의 자식간의
관계를 신화적 요소를 차용하여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어머니)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개인이자 작가로서 이중적인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감정들을 논리 정연한 서사로 정리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파편적이고 모순적인 면모를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풀어낸다.
외로움, 절망감, 불안함, 두려움, 기대감 등 다양한 감정의 파편들은 그의 작업 속에서 모호하고
느슨한 기하학적 도형들, 전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신체의 부분들, 하늘과
바다, 해와 달, 별과 구름, 불과 물 등 현실과 가깝게 맞닿아 있는 실체들을 추상화한 형태로 나타난다.

《낯선 파동》 전시 전경(송은아트큐브, 2019) ©한상아
이처럼 자연적 모티프로부터 출발한 낯선 장면들은 삶의 보편적 이치를 상기시킨다.
자연의 순환은 곧 생과 사의 순리를 떠올리게 하며, 기하학적 도상이나 상징 기호, 대칭적 구도나 상승의 구조는 신화나 종교에서 초월적인 힘에 기댄 치유와 믿음,
신념과 희망 같은 심리를 촉발시킨다.
그러나 이때 작가는 신화나 종교의 코드를 통해 초월적 숭배의 대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작은 일상적 행위들과 존재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여정을 중심에 놓으며, 이를 다른 어떠한 일보다 숭고한 것으로 다룬다.

이러한 작가의 여정을 담은 상징적 이미지 주변으로는 서사의 일부분이 파편적으로 튀어나와 있는 듯한 설치 작업
〈낯선 파장〉(2019)이 놓여 있었다. 짙은 먹색의 공간에서
부유하는 추상적인 모빌 인형 형태의 작업들은, 실제로 그의 자녀가 신생아였던 시기에 신생아가 보는 모빌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광목천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솜을 채워 넣은 뒤 바느질하는 제작
방식은, 쉽게 파손될 위험이 있는 종이와는 달리 아이와 함께 생활하면서도 지속할 수 있는 안전한 작업
방식이었다. 따라서 모빌 작업은 작가로서, 그리고 부모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뾰족한 온기》 전시 전경(바이파운드리, 2022) ©작가 및 파운드리 서울. 사진: Kyung Roh
이후 한상아는 모빌처럼 공중에 매달아 설치하는 ‘행잉’ 작업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포근한 촉감의 광목천을 만지고 엮으며, 솜을 채워 부피감을 만들어 내는 작업 과정은 그에게 치유적 요소로 작용한다.
시각적, 물리적 균형을 찾아 나가며 진행되는 그의 작업은,
엄마이자 전업 작가로서 일과 일상의 균형과 조화를 탐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상아, 〈공탑(空塔) 1〉, 2021, 광목천에 먹, 실, 솜, 가변크기 ©한상아
이처럼 ‘균형’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된다. 예를 들어, ‘공탑’(2021-) 시리즈에서 한상아는 솜으로 부피감을 입은 조형물들을 쌓아가는 과정에서의 균형에 주목했다. 2021년 문화기축기지에서 선보인 〈공탑(空塔) 1〉은 거대한 돌 여섯 개를 쌓아 올린 작업으로, 그 거대한 규모가
마치 절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탑과 닮아 있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존재를 은유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신자들은
그 주변을 돌며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올리곤 한다. 한편 관광객들은 각자 작은 돌을 주워 사찰 근처에
자신만의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빈다.

한상아, 〈공탑(空塔) 5〉, 2022, 광목천에 먹, 실, 솜, 323x114x20.5cm ©한상아
작가의 탑 역시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소망의 마음을 담아 제작되었다. 코로나19로 많은 것이 두려움이 되었던 당시의 상황은 여린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작가에게 있어서 또 다른 불안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작가는 아슬아슬한 탑을 쌓으며 ‘오늘도 무사히’ 보내기를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가의 탑은 육중한 돌로 쌓아 올려진 탑과 달리, 부드러운
솜이 들어간 가짜 돌들이 중력을 거스르며 천장에서 내려온 끈에 의존하여 균형을 이루고 있다.

먹과 천으로 만든 오브제들을 활용한 매달기, 쌓아 올리기, 걸기 등의 조각적 실험들은 2022년 같은 시기에 열린 두 개의
개인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OCI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뾰족한 용기》에서 한상아는 주어진 높은 층고와 넓게 펼쳐진 벽을 무대로 삼아 팬데믹 시기 엄마이자 작가로서 쌓아 올린 서사들을 모빌, 족자, 탑 등의 형태로 풀어냈다.
전시의 제목인 “뾰족한 용기”는
중의적인 의미로, 사회적인 역할에서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함축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전시장의 가로축과 세로축을 따라 확장되는 검고 옅은 장면들은,
뾰족하면서도 둥글기도 한 작가의 마음속 감정들을 대변하듯 위태롭지만 묘한 균형을 맞추며 공간에 펼쳐져 있었다.

《뾰족한 온기》 전시 전경(바이파운드리 , 2022) ©작가 및 파운드리 서울. 사진: Kyung Roh
한편, 같은 해 바이파운드리에서 열린 개인전 《뾰족한 온기》는 엄마이자
작가인 이중의 정체성이 촉발하는 여러 모순적인 감정들 중에서도 ‘사랑’의
마음을 다뤘다.
한상아는 사랑하는 가족의 평온한 나날을 염원하면서도 눈앞의 대상에 항상 예리한 날을 세울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감정과 생각의 편린을 상징적인 표현들로 치환하여 풀어냈다. 이는 무언가를 향해 뻗어 있거나 합장한 손, 불꽃, 별처럼 신화적, 종교적
맥락을 연상시키는 상징들과 구불구불하게 이어지거나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오는 선같이 유기적인 형태가 공존하는 초현실적 장면들로 나타났다.

《Black Flame》 전시 전경(푸마갈리 갤러리, 2024) ©Lucrezia Roda
최근 한상아는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신체론에 관심을 두며, ‘자신의 경계 안에서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역동적인 실천 장소’로서 모성을 해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모성, 신체, 모체에 대해
다뤄 온 한상아의 작업은 나아가 자기와 외부 환경을 잇고 소통하는 영역으로서 신체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작업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밀라노 푸마갈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Black Flame》에서 선보인 ‘공탑’ 시리즈는 꽃과 인체를 결합한 모체 형상을 통해 모성의 따뜻함과 자애로움, 동시에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공포스러운 모성의 복합성과 양가성을 담아낸다.

한상아, 〈Black Figurine 2〉, 2024, 광목천에 먹, 실, 솜 ©한상아
이와 함께 선보인 ‘Black Figurine’ 시리즈는 꽃과 다리를
결합해 출산의 경험과 모성애의 복잡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 중, 〈Black Figurine 2〉(2024)는
양 다리를 벌리고 있는 인체와 꽃의 이미지를 조합하며 작가가 겪은 두 번의 출산 경험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한상아는 삶의 균형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모성, 모체를
인식하고, 이를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천장에 매달아 설치해 오던 기존의 ‘행잉’ 작업에서 나아가 지지대 없이 단독으로 서 있을 수 있는 ‘자립’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한상아, 〈현관(玄關) 2〉, 2024, 광목천에 먹, 실, 솜, 스테인리스 스틸 프레임, 240x200x20cm ©한상아
작가가 ‘자립된 신체들’, ‘살’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근작들은, 단단한 뼈대를 가진 조각적 객체가
되어 존립한다. 예를 들어, 아치형의 자립 작품 〈현관 2〉(2024)는 불교에서 “깊고
묘한 이치에 관통하는 관문”을 일컫는 ‘현관(玄關)’에 착안하여 제작됐다. 작가는
이러한 현관의 이미지와 여성 신체(자궁문)을 결합시키며, 모체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고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소로 확장시킨다.

《살과 섬광》 전시 전경(더 윌로, 2025) ©한상아. 사진: CJY ART STUDIO(Junyong Cho).
이러한 한상아의 작업은 지극히 내밀한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
속에서 고찰하고 있는 다층적 층위의 감정과 경험은 결국 인간이 소중한 대상에게 품는 일반적인 감정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서사는 보는 이와 공감대를
형상하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된다.
”내 작업의 시작은 경험에서 비롯된 신체적, 감정적 기억들로부터 출발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로서의 이행은 내 몸을 더 이상 고정된 장소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타자와 관계 맺는 열린 공간으로 인식하게 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있어 굉장히 실존적인 사건이었고 이후 내 작업은 ‘몸’ 자체보다는 몸이 어떤 방식으로 경계가 되고, 공간이 되며, 생성을 허용하는가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근작에서 등장하는 자연물의 형태들 (잎, 줄기, 뿌리, 돌기, 가시 달린 생물의 형상들) 은 이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한상아, 개인전 《살과 섬광》 작가와의 대화 중에서
발췌)

한상아 작가 ©Lucrezia Roda
한상아는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여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살과 섬광》(더 윌로, 서울, 2025), 《Black Flame》(Galleria Fumagalli, 밀라노, 2024), 《뾰족한
온기》(바이파운드리, 서울,
2022), 《뾰족한 용기》(OCI 미술관, 서울, 2022), 《낯선 파동》(송은아트큐브,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DMA CAMP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대전창작센터, 대전, 2023), 《小小하지
않은 日常》(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22), 《summer love》(송은, 서울, 2019), 《광주화루
– 10인의 작가전》(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8), 《백화만발 만화방창(百花滿發萬化方暢)》(경기도미술관, 안산, 2016)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한상아의 작품은 성남문화재단, 파운드리 서울, 송은, OCI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
- 한상아, Sang A Han (Artist Website)
- 파운드리, 한상아 (FOUNDRY, Sang A Han)
- 위켄드, [작가 노트] 낯선 사이 (WEEKEND, [Artist Note] Unfamiliar Space)
- 공예문화, 먹과 바느질로 그리는 여성의 서사: 한상아의 세계, 2024 겨울호
- 아트바바, 송은아트큐브 – [서문] 낯선 파동 (Artbava, SONGEUN ARTCUBE – [Preface] Unfamiliar Wave)
- OCI 미술관, [서문] 뽀족한 용기 (OCI Museum of Art, [Preface] Pointed Warmth)
- 파운드리 서울, [서문] 뾰족한 온기 (FOUNDRY SEOUL, [Preface] Pointed Warmth)
- 메종코리아, 기억의 흔적, 2024.09.02
- 비애티튜드, 날카롭지만 무디고, 무디지만 날카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