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협(b. 1986)은 다른 것들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하는 ‘순종’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순종화되는 과정에서 제거되는 다양한 가능성을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서로 다른 매체들이 지닌 감각과 형식을 뒤섞는 방법을 실험해 오며 ‘순종’이 만들어낸 서사에 균열과 틈을 만들어 기존의 체제와 사고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서성협, 〈위상감각 ver.1〉, 2020, 합판에 먹, 전기 모터, 나무 구슬, 소리북, 혼합매체, 240x300x300cm, 《위상감각》 전시 전경(얼터사이드, 2020) ©서성협. 사진: 김진호.

서성협은 서로 다른 매체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감각을 뒤섞는 방법을 ‘위상학적’이라고 부른다. 또한 위상학적 방법론에서 파생되는 감각을 ‘위상감각’이라 정의하고, 이를 고유의 형식으로 정립하기 위한 조형적 실험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위상감각’에 대해 다룬 그의 첫 개인전 《위상감각》(얼터사이드, 2020)에서는 전통과 동시대 사이의 위상, 시각예술과 음악 사이의 위상, 그리고 연주자와 관객 사이의 위상이 입체적인 관계 속에서 팽팽하게 움직이는 감각의 장을 구현했다.

《위상감각》 전시 전경(얼터사이드, 2020) ©서성협. 사진: 김진호.

전시는 소리를 내는 기계들로 가득했다. 나무공을 들어 올려 돌아가는 북 위로 떨어뜨리는 일을 반복하는 기계는 건축물로 보이는 동시에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며,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하나의 악기처럼 인식된다.  

그 안에서 관객들은 공간을 채우는 소리를 들으며 움직이거나 소리의 출처를 찾고자 그곳에 놓인 사물들을 관조한다. 그 순간 악기였던 대상은 시각적인 대상으로 전이됨으로써, 악기의 위상에서 조각의 위상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서성협, 〈위상감각 ver.1〉, 2020, 합판에 먹, 전기 모터, 나무 구슬, 소리북, 혼합매체, 240x300x300cm, 《위상감각》 전시 전경(얼터사이드, 2020) ©서성협. 사진: 김진호.

그리고 무엇이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그의 사물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순간, 그 안에 동양의 악기와 서양의 건축, 당대적인 디자인과 전통적인 요소가 뒤얽혀 있는 혼종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이 거대한 사물의 위상은 조각과 악기,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재 사이를 계속해서 맴돌며 공간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 안에 놓인 사람들 또한 각자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소리를 내는 사물에 의해 관객과 연주자 사이의 위상을 오가게 된다.

서성협, 〈소리액자〉, 2020, 합판에 먹, 스피커, 오케스트라 사운드, 혼합매체, 가변크기, 《위상감각》 전시 전경(얼터사이드, 2020) ©서성협. 사진: 김진호.

서성협은 이처럼 혼종적인 상황을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구축함으로써 위상과 감각의 문제를 다룬다. 전시 《위상감각》은 그 안의 사물들과 움직이는 존재들이 서로 관계하며 특정할 수 없는 연결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짐으로써 음악, 건축, 조각, 공연이 한데 겹쳐 있는 혼종적 장소가 된다.  

서성협,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 Vol.1〉, 2020, 퍼포먼스(거문고 연주 & 작곡: 박다울) ©서성협

이처럼 서성협의 작업 속에 놓인 모든 존재들은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위치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주변과의 관계에 의해 계속해서 변화한다. 권태현 큐레이터는 이러한 그의 작업에 대해 “주체와 객체, 부분과 전체, 그리고 각기 다른 예술적 전통과 장르 사이에서 진동하는 감각적 덩어리”라고 표현한다.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 전시 전경(TINC, 2021) ©서성협

2021년 THIS IS NOT A CHURCH(TINC)에서 열린 개인전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에서 서성협은 과거 교회였던 전시 공간의 맥락과 관계하여 뒤섞일 수 있는 ‘위상감각’적인 설치 작품들을 선보임과 동시에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했다.  

전시장에는 다양한 오브제가 공간 전체에 흩어져 있어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고 소리를 내며 관계했다. 몇몇의 장치에는 움직임 감지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 관객이 가까이 다가갈 때 소리를 내거나 작동하기 시작하곤 했다.

서성협, 〈소리병풍 01〉, 2021, 합판에 먹, 아두이노, 모터, 콘트라베이스, 피에조 픽업, 가야금: 박경소, 45x190(h)x35cm. 엔지니어링 디자인_아르시오.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 전시 전경(TINC, 2021) ©서성협

그리고 각 사물들은 이전의 ‘위상감각’ 프로젝트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동양과 서양, 악기와 조각 사이의 위상이 뒤바뀌는 가변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소리 병풍’ 시리즈의 사물들은 동양의 국악기인 가야금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외형은 몰딩이나 서양식 가구의 장식적인 요소들과 함께 바이올린, 첼로, 비울라, 콘트라베이스와 같은 서양 악기의 부분들이 몸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본래 배경으로만 쓰여 왔던 사물인 ‘병풍’의 위상을 깨고, 이를 중심, 주인공, 또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주체적인 오브제로 전환시키고자 했다고 말한다.

서성협, 〈당산기둥〉, 2021, 합판에 먹, 방울, 모터, 아두이노, 스피커, 사운드. 가변설치. 엔지니어링 디자인_아르시오,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 전시 전경(TINC, 2021) ©서성협

한편 또 다른 작업 〈당산기둥〉은 서로 다른 종교적인 맥락이 시공간적인 차원에서 충돌하고 뒤섞이는 장면을 자아냈다. 서구에서 비롯된 종교인 기독교의 맥락을 지닌 이 공간에 놓인 기둥 형태의 구조물 안에는 한국 무속 신앙의 핵심 의례인 ‘굿’에 사용되는 방울이 달려 있었다.

서성협, 〈당산기둥〉, 2021, 합판에 먹, 방울, 모터, 아두이노, 스피커, 사운드. 가변설치. 엔지니어링 디자인_아르시오,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 전시 전경(TINC, 2021) ©서성협

그러나 이 오브제에 장착된 스피커에서는 서양의 성당에서 채음한 소리들이 흘러 나옴으로써, 다시 한번 그 위상이 뒤바뀌게 되고 혼종성은 더욱 심화된다.
 
이로써 서성협은 과거 교회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는 이 공간에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를 충돌시키며 새로운 울림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서성협, 〈기념비 #01〉, 2022, 합판에 먹, 유채, 스텐실, 목소리: Andrzej Jaświłek, 250×245×275cm ©서성협

이러한 서성협의 작업들은 사운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면, 2023년 김희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잡종예찬》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보다 시각 매체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시 《잡종예찬》은 작가 개인의 사적인 경험들과 그에 따른 미시사건에서 출발한다.  

방파제를 구성하는 테트라포드에 도리아식 주두를 얹은 대형 조각 작업 〈기념비 #01〉(2022)의 표면에는 폴란드어로 된 텍스트가 새겨져 있다. 이는 폴란드인 아내와 가정을 꾸린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서양의 문화가 개인적 차원에서 충돌하며 생긴 에피소드를 폴란드어로 번역한 글이다.

서성협, 〈기념비 #02〉, 2023, 나무에 먹, 유채, 스텐실, 390×245×275cm, 《잡종예찬》 전시 전경(김희수아트센터, 2023) ©서성협

서성협은 일반적으로 기념비에 새겨지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아닌 개인적이고 사적인 미시사건을 기념비라는 장소에 새기는 행위를 통해서 구성된 역사를 조명하고 사건의 위상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이후 제작된 〈기념비 #02〉(2023)에서 작가는 동서양의 삽화 또는 백과사전의 도판, 타투에 사용되는 도상으로 구성된 혼종적인 이미지들을 기념비에 새겼다. 이미지의 구성은 특정 사건의 서사 구조를 띄기보다는 마치 몸에 새기는 타투처럼 무작위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서성협, 〈어떤 이어짐〉, 2023, 나무에 먹, 비가청 사운드, 77×95×86cm, 가변설치, 《잡종예찬》 전시 전경(김희수아트센터, 2023) ©서성협

한편 〈어떤 이어짐〉(2023)은 ‘기념비’ 시리즈에서 사용한 테트라포트를 축소해 실제 방파제처럼 설치함으로써 ‘이어짐’의 연대를 표현하고 있었다. ‘기념비’ 시리즈의 경우 사건의 완결 혹은 드러냄을 의미하였다면, 〈어떤 이어짐〉에서는 혼종의 연대를 통해서 사건화 혹은 존재화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얽혀 섞인 상태로 존재를 드러내며 단일한 순수함, 즉 ‘순종’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작가는 우리의 전통적인 맥락에 존재해온 여러 객체들을 변용하고 혼합하며 기존의 위상을 깨고, 무작위적으로 나타나는 혼종적인 존재들을 예찬하고 연대한다.

서성협, 〈껍데기의 기념비 #01~03〉, 2024, 나무에 스테인, 라탄, 가죽, 스피커, 3채널 사운드 루프, 150×180×160cm, 가변 설치 ©서성협

서성협은 최근의 작업에서 재료 물성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경계’라는 개념을 시각화하거나 기존의 사물이 가진 기능을 떼어내어 이질적인 객체와 위상학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테면, ‘기념비’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껍데기의 기념비’(2024) 시리즈는 가죽과 라탄이라는 가볍고 유연한 재료로 방파제를 재현한다. 작가는 가죽과 라탄 모두 표면의 경계를 형성하는 껍데기라는 점에 주목하며, 이 두 재료를 활용해 내부가 빈 테트라포드를 제작함으로써 껍데기라는 경계 공간과 재료의 특성을 시각적으로 탐구했다.

서성협, 〈흡기와 배기〉, 2024, 송풍기, 마이크 스탠드, 덕트 호스, 하모니카, 50×60×30cm ©서성협

한편 또 다른 근작 〈흡기와 배기〉(2024)는 다년간 창작 창법론으로 삼은 위상학적 배경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작품 제목인 ‘흡기와 배기’는 동력기관이 산소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기계적 행위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 호흡의 메커니즘을 인간의 들숨과 날숨에 비유해 하모니카와 위상학적으로 연결 지었다.  

서성협은 이처럼 생성의 메커니즘을 “위상수학의 위상동형으로 상정하면, 이질적인 것 혹은 다른 위계에 있는 것을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이 열리고,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방법론으로 기능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작가는 범주나 위계의 사이와 경계 공간을 탐구해 오고 있다.

서성협, 〈벤틸레이터 주두를 올린 기념비〉, 2024, 나무에 스테인, 벤틸레이터, 270×245×275cm ©서성협

‘순종’이라는 것이 어쩌면 구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그의 작업은 혼종적인 상태를 재현하고 변용하여 순종이 만들어 온 서사 즉, 전통과 순종의 공동체에 대한 허구성을 드러낸다. 최근 그의 작업은 혼종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혼종의 공간으로 주제를 확장해 나가며, 혼종을 특정한 장소로 개념화하고, 그 소수성과 생성의 의미를 탐구해 오고 있다.  

 ”제가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국 “우리 모두 혼종일 수 있고, ‘민족’이나 ‘우리’라는 상상된 공동체, 즉 순종으로 분류되는 것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증명 받으려는 것은 아닐까?”입니다. 그래서 ‘순종’이라는 것이 어쩌면 구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 저의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성협, 수림아트랩 신작지원 2023 작가 인터뷰 중) 


서성협 작가 ©퍼블릭 아트

서성협은 디자인을 전공한 후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했으며, 자유로운 창작을 위해 디자이너에서 시각예술가로 전향해 현재 작가로 활동 중이다. 개인전으로는 《MIXED SUBLIME》(공간 형, 서울, 2023), 《잡종예찬》(김희수아트센터, 서울, 2023),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TINC, 서울, 2021), 《위상감각》(얼터사이드, 서울, 2020)이 있다.
 
또한 작가는 《궤적을 연결하는 점들》(고양시립 아람미술관, 고양, 2024), 《퍼블릭아트 뉴히어로》(K&L 뮤지엄, 서울, 2024), 《전시후도록》(WESS, 서울, 2022), 《미술관의 입구: 생태통로》(경기도미술관, 안산, 2022), 《ZER01NE DAY》(현대자동차, 서울, 2021; 201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서성협은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2022년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에 입주 작가로 참여하였으며, 2023년 ‘퍼블릭아트 뉴히어로’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