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지(b. 1994)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적이고 친밀한 감정, 낭만적인 분위기와 여운을 그림으로 남긴다. 직접 본 풍경이나 사물을
비롯하여 주변 인물들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의 회화는, 대상 자체에 방점을 두기 보다는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연결의 순간과 인상을 포착한다.

정이지의 작업은 친밀한 찰나의 순간을 스냅 사진이나 드로잉으로 담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주변 사람들의 내면에서 자신과 같은 부분을 발견하고, 그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새로이 알게 되고,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찰나의 느낌을 빠르게 기록한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은 그 원본인 스냅 사진을 연상시키거나 청춘 영화의 스틸 컷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이러한 찰나의 순간들은 정이지의 캔버스 화면 위에서 경쾌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적확한 붓질을 통해 특별한
회화적 순간으로 거듭난다.

정이지의 첫 번째 개인전 《숏 컷》(어쩌다갤러리2, 2019)에서는 이러한 사소하지만 친밀한 감정의 순간들을 담은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하는 정이지의 그림에는 자연스럽게 작가 또래 여성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작가는 이 젊은 여성들을 미화하거나 젊음을 예찬하는 식으로 담아내는 것을 지양하며, 대상 자체의 묘사보다는 전반적인 장면의 분위기를 통해서 아름다움이 전달되는 사진을 선택한다. 그러한 사진을 고른 다음, 그 순간의 분위기가 떠오르는 부분과 장식적인
요소를 구별하며 장면을 크롭한다.

그림으로 옮길 때에는 인물의 고유한 인상을 유지하되 너무 묘사에 치중해 생김새만이 부각되지 않도록 간결하게 채색하며
화면 속 공간과 대상의 조화를 이루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정이지는 단숨에 그린 듯한 가벼운 붓터치로
화면을 채운다. 머뭇거림 없이 경쾌하게 그어졌지만 단단한 붓터치는 그가 포착하고자 하는 찰나의 애정
어린 순간들과 같은 결을 공유한다.
정이지는 작가 노트에서 “각각의 장면들이 꼭 그림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언어적인 논리가 아니라 그리기 방식으로 설득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즉, 작가는 봇을 움직이고, 캔버스를 쓰다듬고, 물감의 농도를 조절해 번지거나 맺히게 한 모양새로 그 장면이 그림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설명되길 바라며 그림을
그린다.

정이지의 간결한 인물 표현은 구체적인 대상을 특정하지 않게 됨으로써, 작가
개인의 사적인 순간에서 출발하였음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주변의 다양한 관계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세밀한
대상의 묘사에서 벗어난 그의 회화는 정이지 개인의 순간만이 아닌 모든 애정 어린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사소하지만 붙잡고 싶은 다수의 이야기를
내포한다.

《My Salad Days》 전시 전경(상업화랑, 2022) ©상업화랑
2022년 상업화랑에서 열린 정이지의 두 번째 개인전 《My Salad Days》는 찬란한 젊음의 쓴맛에 비유한 자신의 일상과 추억을 파고들어 작가 스스로가 내부자이자
동시에 관찰자가 된 순간의 회화적 기록들로 이루어졌다.
전시는 작가가 시간의 단위들에 주목하여 흩어진 시간의 가장 작은 입자를 감각하는 추억을 파편적으로 선택한다. 대상을 시간의 입자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태도는 전시 주요 작품인 흑백의 두 회화 〈우주를 보고〉(2021)와 〈한 알의 모래알에서〉(2021)에서 캔버스의 크기와
제목을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My Salad Days》 전시 전경(상업화랑, 2022) ©상업화랑
〈한 알의 모래알에서〉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1863)의 첫 구절 “모래
한 알 속에서도 세상을 보며(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에서 착안하여
그려졌다. 여기서 작가는 모래 한 알 속에 고스란히 축적된 시간의 단위에 대한 은유를 통해 가장 하찮고
사소할 수 있는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자신을 투영하고자 했다.
한편 작은 프레임의 연필 드로잉에서 시작된 〈우주를 보고〉는 시원하게 그려진 야경 사이에 번지는 빛의 형태를
담고 있다. 이는 기존에 작가가 보여주었던 풍경화와는 달리 어둠과 빛이라는 비물질의 형태에서 오는 강한
대비의 감각 자체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표현은 전통적인 풍경화의 방식과 달리 풍경을 재현하기 위한 요소들을 탈락시키면서, 그림자와 빛만 남은 추상적인 형태들과 그날의 인상만을 남긴다. 아울러, 캔버스 표면에 얇게 얹혀진 인디고와 세피아, 페인즈 그레이 등 붉은 갈색과 보랏빛이 도는 진회색 물감으로 표현된 어둠은 추상적이고 오묘한 풍경의 실루엣을 만들어 낸다.

《My Salad Days》 전시 전경(상업화랑, 2022) ©상업화랑
《My Salad Days》에서 선보인 인물화에서는 캔버스에 대상과 주변을 담는 방식에 따라 자신의 회화가 지속적으로 읽혀졌으면 하는 방향에 대한 작가의 고민들이 묻어난다. 그간 정이지는 인물 자체에 무게를 두거나 장소가 담고 있는 독특한 구조와 분위기로 시선이 확장되는 방식으로 회화를 구상해 왔다.

그에 따라 인물을 내면화 하여 대상에 대한 가능성을 관찰자에게 열어 두거나 사적인 기록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는
등 작업에 방향성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재구성된다. 정이지는 만화적인 기법 중 하나인 프레임 내에 장면을
포착하는 ‘컷’의 전달 방식을 자신의 회화에 가져옴으로써, 관찰자인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속 대상 자체보다 프레임 속 특정 상황으로서 하나의 ‘컷’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분절된 시간 안에서 형식적으로 해체되는 ‘컷’의 전달 방식은 가장 압축적인 정제된 순간으로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이 압축된 전달 방식은 보는 이에게 대상의 상태, 존재, 혹은
기억이나 다가올 것들을 상상해보게 한다.

아울러, 작가는 기억의 이미지들을 테두리가 제거된 회화적 기법으로
전환한다. 뚜렷한 윤곽선 없이 박제된 화면은 그 당시 스쳐 지나갔던 감각들을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또는 인물에는 윤곽선을 부각하는 한편 배경으로서의 풍경과 정물은 윤곽선 없이 사실적으로
명암 처리함으로써 둘 사이의 괴리를 발생시키며 인물을 중심으로 느꼈던 감각의 순간을 표현한다.
이처럼 정이지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정서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완벽하게
정돈된 만화적 문법을 익히기보다는 가감없이 쏟아 내는 아마추어적인 만화들의 기법을 실험하며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풋내기 시절에 대한 정서와
감각들을 담아낸다.

이처럼 정이지는 “한 알의 모래알”처럼
사소한 순간들에 축적된 시간을 바라보며 주어진 일상을 잔잔하게 기록해 왔다. 그 안에 담긴 몇 인물들은
무심하게 보면 자화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이 닮고 싶은 닮은 이를 먼발치서 그린 것이다.
그동안 인물 주변을 조심스럽게 우회했던 기록들은 작가가 안고 있었던 정체성의 묵은 고민과 갈등의 태도를 반영한다.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닮아가고자 했던 사고의 흐름은 2022년
N/A 갤러리에서 열린 단체전 《Ziggy Stardust》에서
선보인 네 점의 인물화로 이어졌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라는 관계의 공식을 화면 안에 풀어나갔다.

정이지, 〈One〉, 〈Two〉, 2022, 캔버스에 유채, 각 27.3x34.8cm, 《Ziggy Stardust》 전시 전경(N/A 갤러리, 2022) ©N/A 갤러리
화면을 과감하게 분절된 시간 안에서 크롭한 ‘컷 업(Cut-up)’과 두 가지 크기의 캔버스 네 점에 동일 인물이 반복적으로 묘사된 방식은 인물에 집중적으로 몰입하도록
한다. 작업에 차용된 카툰 프레임과 영화적 기법은 페르소나를 향한 자아의 기억과 경험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면서, 작가의 시선은 화면 밖 관찰자로 이동하게 된다.
스스로를 향한 의지의 돌파구를 중심으로, 자신과 함께 공유했던 시간과
공간에서 인물 주변을 어디까지 화면에 담을 것인지 매순간 선택해 왔던 작가는, 점차 인물 자체에 무게를
두거나 장소적 특성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전시를 통해 부수적이었던 인물을 중심에 두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페르소나와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정이지는 과감한 프레이밍이나 극대화된 스케일 등 회화적 실험을 해오며 자신의 솔직한 정서를 전달하는 회화적
진정성을 캔버스 화면에 담아 왔다. 몇 번의 붓질로 볕과 그늘, 여러가지
다른 질감, 인물의 인상, 대기와 시간대를 만들어 내는 정이지의
회화는,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작게 빛나는 모래알을 발견해 내는 듯한 기쁨과 함께 멜랑꼴리한
청춘의 정서를 담고 있다.
여러 장의 찰나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정이지의 회화 세계는 작가의 삶에 대한 기록이자 삶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평범한 일상을 함께하는 소중한 이들과의 친밀한 순간들은 그의 삶을 이루고, 캔버스
위로 차곡차곡 기록되어 하나의 장편 다큐멘터리를 이룬다.
”내가 주로 그림에
담으려 하는 사적이고 친밀한 감정, 낭만적인 분위기와 여운은 그들과 나 서로 간의 깊은 존중과 애정,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려는 각자의 끊임없는 분투에 대한 응원에서 비롯된다. 때로는 정물이나 풍경을 그리는데 그 자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그것이 나에게 사람들 간의 어떤 관계 혹은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정이지, 작가 노트)

정이지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조형예술과 학사와 석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My Salad Days》 (상업화랑, 서울, 2022), 《숏 컷》(어쩌다갤러리2, 서울, 2019)가 있다.
참여한 단체전으로는 《Next Painting: As We Are》(국제갤러리, 서울, 2025), 《비누향》(콤플렉스 갤러리, 서울,
2024), 《Seize the Moment》(노블레스
컬렉션, 서울, 2023), 《바르르 파르르(barrr parrr)》(KT&G 상상마당 춘천 아트센터, 춘천, 2023), 《페리지 윈터쇼 2022》(페리지갤러리, 서울, 2022), 《The Seasons》(디스위켄드룸, 서울, 2022), 《21세기 회화》(하이트컬렉션, 서울, 2021) 등이 있다.
정이지는 더프리뷰 서울(2025), 아트부산(2023) 등 아트 페어에 출품한 바 있으며, 2019년에는 독립
출판물 『Piece Pith』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References
- 오브제후드, 정이지 (Objethood, Yiji Jeong)
- 리바트, 반짝이고 서툴렀던 나의 풋내기 시절에게
- 루이즈아트, 《숏 컷》 정이지 개인전, 2019.05.04
- 상업화랑, [서문] My Salad Days (Sahng-up Gallery, [Preface] My Salad Days)
- N/A 갤러리, [서문] Ziggy Stardust (N/A Gallery, [Preface] Ziggy Stardust)
- 국제갤러리, [서문] Next Painting: As We Are (Kukje Gallery, [Preface] Next Painting: As We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