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리(b. 1992)는 현실과 가상, 입체와 평면, 물질과 환영 등 서로 상반되는 요소들을 하나의 화면
안에 교차시키며 기이한 감각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회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작가는 그림 속의 환영적
가상 공간, 실제 공간에 있는 이의 움직임, 그리고 가상과
실제가 교차하는 시간이라는 세 개의 축을 작업 안에 연결해 오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정지된 평면 너머의
움직임과 공간감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조효리의 첫 번째 개인전 《Your Clock is BEHIND / Your
Clock is AHEAD》(갤러리 엔에이, 2020)에서는
회화에 대한 작가의 시각적이고 개념적인 접근이 두드러지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제목으로 사용된 문장 “Your Clock is BEHIND / Your Clock is AHEAD”는 컴퓨터 기기의 시간이 현재가
아닌 먼 과거 혹은 먼 미래로 잘못 설정되어 있을 때 인터넷 창에 뜨는 오류 문구다. 작가는 이로부터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와 미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부유하는 시선에 대해 상상하며, 이를 회화와 연결
지었다.

《Your Clock is BEHIND / Your Clock is AHEAD》 전시 전경(갤러리 엔에이, 2020) ©조효리
이 문구는 그의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함축한다. 조효리는 교차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생각하며 오브제들을 길 가다 줍듯 흩어진 기억들을 그러모아 3D 공간 시뮬레이션을
통해 동시의 환영적 공간을 구현한 다음 이를 캔버스 위로 옮긴다.
“Your Clock is BEHIND / Your Clock is AHEAD”라는
문구에는 그의 작업에 있어서 ‘앞’면과 ‘뒤’면의 관계를 만들거나, 그림
안에 오브제들이 ‘앞’, ‘뒤’로 심도를 가지고 놓여져 환영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 이러한 공간이
항상 시간성과 맞물리면서 구성된다는 점, 그리고 최종 결과물에 대한 3D
공간 시뮬레이션을 통해 꽤나 완고히 예견된 미래에 목표를 두고 진행하는 과정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효리의 회화는 움직이는 물체를 연속적으로 그려 시간의 흐름을 상상할 수 있게 하거나, 캔버스의 앞뒤, 옆면을 모두 활용하여 관객이 몸을 움직이며 작품의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끔 하는 장치들이 심어져 있다.
작가는 캔버스를 그림 내부의 가상 공간 한복판에 떠 있는 하나의 평평한 막이라고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그는 캔버스라는 막을 둘러싼 공간을 만들고 그리며, 그러한 공간이
이 막을 통해 실제 공간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의 그림에는 워터마크가 양각으로 얹혀 지기도 하는데, 이는
막의 존재와 물감의 물성을 상기시키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저작권을 지키기 위해 덧씌워진 워터마크는 원본
이미지를 온전히 보기 어렵게 만든다. 워터마크에 익숙한 세대인 조효리는 이미지로부터 시선을 튕겨 나오게
만드는 워터마크의 효과를 작업에 활용하여 시지각적 환영을 물화하는 실험을 평면의 경계에서 해오고 있다.

조효리는 첫 번째 개인전에서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작가의 생각들을 모아 표현했다면, 두 번째 개인전 《Extended Play》(갤러리 아노브, 2021)에서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경험과 감정적, 정서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선보였다.
작가에 따르면 이전의 작업에서는 사적인 일상과 거리를 두고 그림을 그리며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지만,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며 일상에서 경험한 순간들 속에서 느낀 감정들을 작품 안에 은유적인 방식으로 녹여 내려
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누운 잔디를 그린 〈I
was there〉(2021)은 산책을 하다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당시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던 작가는 산책을 하던 중 무성한 풀숲 가운데 일부만 잔디가 누워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매 순간 제 자리에 서서 통제할 수 없이 벌어지는
일들을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 작가는 비가 내린 다음 날이라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밟아서 눌린 것인지 모르겠는 이 잔디의 이미지를 다시 꺼내어 캔버스 위로 그리게 되었다.

한편 2022년 디스위켄드룸에서 정이지 작가와 함께 가졌던 2인전 《The Seasons》에서는 지속적으로 작업에 등장해온 중첩된 장막의 개념(워터마크, 레이어 등)이 더 이상 회화적 프레임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 구조 속으로 녹아 들어 전시장 곳곳을 점유하는 실체적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조효리, 〈서곡〉, 2022, 캔버스에 아크릴, 종이, 각 225x162cm ©조효리
예를 들어, 〈서곡〉(2022)은 두 개의 캔버스를 공간 모서리 벽면에 맞춰 조립 설치된 작품으로, 회화 속 비현실적이고 환영적인 공간감은 실제 물리적 공간과 중첩되어 실재와 가상 사이의 묘한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화면 속 잘려 나간 종이의 틈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가상의 공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납작한 평면 너머 무한히 확장하는 미지의 영역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조효리의 회화적 이미지는 그리기의 기본적인 행위에서 출발하여 이미지의 환영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납작한 평면에서 전시 공간으로 확장된 워터마크, 건축적으로 구축된 회화 설치와 더불어, 작가는 이미지의 환영을 다양한 소재와 오브제를 활용해 입체의 형태로 물화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It’s
raining, Mr. Judd〉(2022)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조각 설치 작품으로, 표면에는 레진으로 만들어진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물방울은 주변 공간과 다른 작품들을 반사시키며 또 다른 차원의 환영감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장치들은 조효리의 작업이 회화라는 매체의 경계를 넘어 평면과 입체, 그리고
공간을 아우르며, 현재와 미지의 영역 사이를 매개하는 포털이 되도록 돕는다.

조효리, 〈Horizontal Cocktail〉, 2024, 캔버스에 아크릴, 종이, 각 160x160cm ©조효리
2024년 OCI 미술관에서 열린 조효리의 세 번째 개인전 《Horizontal Cocktail》에서는 여러 액체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에 착안하여 시간이 순환하는 장면들을 묶어 선보였다. 그동안 소재 중심으로 과거화 현재, 그리고 근미래를 파편적으로 다뤄왔다면, 본 전시에서는 작가가 설정한 동선을 통해 특정 소재와 장치들을 중심으로 시공간의 순환 구조를 시각화했다.

이 작업들에서 조효리는 지난 회화사에서 시간의 감각을 여러 방식으로 다뤄왔던 장치들, 가령 빛과 색을 통해 특정 인상을 포착하기 위한 개념과 고전적인 풍경화에서 벗어나 자연이 갖고 있는 잠재력에 주목했던 독일 낭만주의, 사물과 시공간의 왜곡을 극대화한 초현실주의, 나아가, 시각적 장면의 상상을 유도하는 특정 문학, 영화적 촬영 프레임과 광고 이미지 기법 등 여러 참조점을 활용했다.

또한 작가는 움직이고 흐르는 시간의 속성을 시각화 하고자, 정해진
형체 없이 계속해서 흘러 고이고, 증발하기를 반복하는 액체 이미지가 가진 순환 구조를 작업에 담았다. 먼저 3D 프로그램을 통한 가상 환경 안에서 액체 이미지에 중력을
적용시키고 풍속과 조도의 수치와 방향을 설정하여 시간의 감각이 반영된 상황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때 작가는 액체의 중력과 마찰로 인해 사방으로 움직이는 투명한 입자에 초점을 둠으로써 부유하는 시간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투명한 칵테일 잔들을 등장시켰다.

이러한 시간의 유동성과 순환 구조는 전시의 동선과 맞물려 작동한다. 전시장
도입부에 설치된 회화 〈Cocktail to Go〉(2024)는
앞으로 전진하는 자동차 내부에서 바깥을 관조하는 작가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은유적인 방식으로 움직임을
시사하는 이 작품 뒷면에는 차량 안에 위치한 작가의 신체, 그러나 신체가 소거되고 선글라스에 반사된
차량 정면의 유리 바깥 공간을 보여주는 회화
〈Sunglass and Mask〉(2024)가
부착되어 있다.
시선 안과 밖을 동시적으로 투영한 내외부를 매개하는 두 개의 캔버스는 물리적인 시공간의 안과 밖, 그리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전복시키는 시퀀스가 전시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더불어, 해가 뜨고 지는 상반된 운동감과 시간의 양 축 경계에
위치한 노을이라는 시간대가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이는 그의 작업에서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동시적으로
지속하는 시간의 흐름 그 중심에 있는 상징적인 풍경으로 자리한다.

이처럼 조효리는 회화와 입체, 공간을 아우르며 이미지의 환영성을 다양한
방법과 구성을 통해 구현해 낸다. 작가는 현실에서 보고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시점과 소재가 중첩되는
다차원의 시공간을 상상하고, 그 결과물을 납작한 평면에서 공간으로 확장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생경한 시간의
허구적 경험으로 이끈다.
이와 같은 조효리의 회화적 실천은 전통적인 회화의 범주와 감각 방식의 안팎을 건드리며, 오늘날 회화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메타 회화’로서 주목받고 있다.
”오류를 남겨둔
채 부유하는 시간 속에서 이미지를 낚아 올린다.” (조효리, 작가노트)

조효리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과 학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평면전공
전문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Horizontal Cocktail》(OCI 미술관, 서울, 2024),
《Extended Play》(갤러리 아노브, 서울, 2021), 《Your
Clock is BEHIND / Your Clock is AHEAD》(갤러리 엔에이, 서울, 2020)이 있다.
또한 작가는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일민미술관, 서울, 2023), 《윈도우
리컨스트럭션》(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3), 《물거품, 휘파람》(두산갤러리, 서울, 2022), 《용도의 쓸모
2, 3장》(을지예술센터, 서울, 2022), 《The Seasons》(디스위켄드룸, 서울, 2022), 《공중체련》(라라앤, 서울, 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조효리는 2023년 ‘2024
OCI YOUNG CREATIVES’에 선정되었으며, 2024 프리즈 서울에 참여하며 주목해야
할 신진 작가 10인에 이름을 올렸다.
References
- 조효리, Cho Hyo Ri (Artist Website)
- 갤러리 엔에이, Your Clock is BEHIND / Your Clock is AHEAD (Gallery N/A, Your Clock is BEHIND / Your Clock is AHEAD)
- 리바트, [신진탐색] 자메뷰, 어쩌면 데자뷰
- 비애티튜드, 기이한 환영의 세계
- 아트인컬처, 쨍그랑! 감각의 해방
- 디스위켄드룸, [서문] The Seasons (ThisWeekendRoom, [Preface] The Seasons)
- OCI 미술관, [서문] Horizontal Cocktail (OCI Museum of Art, [Preface] Horizontal Cockt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