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로(b. 1986)는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시대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추상 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해 오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명명한 ‘유사 회화’라는 개념 아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윤향로는 동시대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의 기술적 측면에 주목하고,
대중문화와 미술사적 레퍼런스 등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소를 포토샵과 같은 디지털 이미징 기술로 변주하여 회화로 옮긴다.

대표적으로 윤향로의 ‘Screenshot’(2017) 시리즈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정 장면을 스크린샷(화면 캡처)을 포토샵 등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변형한 후 회화로 옮기는 작업이다. 이전의 작업에서 작가는 회화의 평면성에 집중해
왔다면, ‘Screenshot’ 시리즈부터는 더 나아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오가는 추상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작업은 일본의 유명 미소녀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변신하거나 악당과 전투할 때 에너지 혹은 아우라가
발산되는 장면들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여러 차례의 디지털 가공을 거쳐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추상 이미지로 변형된다. 스크린샷으로 고정된 장면은 독립된 개체가 되고, 포토샵을 통한 여러 번의 확대 크롭을 거쳐 추상화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형상은 붓이 아닌 에어브러시로 캔버스 위에 옮겨지며 디지털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표면에
가깝게 표현된다.

시리즈 초반에는 스크린샷 이후 이미지에 전체적으로 포토샵 효과를 주는 방식이 개입되었다면, 2017년 두산갤러리 뉴욕에서의 개인전 《Liquid Rescale》에서
선보인 작업에서 작가는 캡처한 장면 중 필요한 일부만 잘라낸 후 편집하였다.
윤향로는 이 과정을 “이미지를 추적해 나가는 여정”이라 설명한다. 또한 특정 이미지를 취사선택 후 디지털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해 편집하는 일련의 과정은 오늘날 동시대 이미지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과도 닮아 있다.

이처럼 디지털 매체에서 선택한 이미지를 복제, 해체,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윤향로의 회화적 실험은 전통적인 추상표현주의 회화나 ‘회화적 회화’와 구분된다. 기존
회화의 범위를 확장하는 윤향로의 ‘유사회화’ 작업은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 끊임없이 가공되고 복제된 채 떠돌아 다니는 이미지들을 추적해 가며 동시대의 풍경을 포착한다.
나아가 윤향로는 미술 안에서 서로 다른 매체 간에, 다양한 문화의
범주 안에서 다른 문화 간에 서로의 형태를 의태하며 생기는 경계에 주목했다. 가령 ‘Screenshot’ 시리즈는 전통적인 회화의 틀인 ‘캔버스’에서 벗어나 조각, 카펫, 라이트
박스 등 다양한 매체로 전환되기도 했다.

이후 윤향로는 2020년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캔버스들》에서 미술사적 레퍼런스에 개인 삶의 서사를 연결 지으며 스스로의 자화상과 같은 전시를 구성했다. 개인으로서 겪은 삶의 사건들을 작업의 촉매로 삼은 ‘캔버스들’ 시리즈는 이전 세대의 추상표현주의 작가 헬렌 프랑켄탈러의 활동을 정리한 책 내용을 발췌하여 개인적 서사와 연결 짓는다.

또한 회화의 층위와 평면성에 관심을 가져 온 윤향로는 이 연작에서 고민의 범주가 삼차원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작가는 작품 제작에 앞서 학고재 본관의 모든 내벽을 감싸는 ‘디지털
매핑 이미지’를 만들어 전시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가상의 캔버스를 구축했다.
그리고 윤향로는 이 가상 공간의 벽면으로부터 작은 조각 이미지들을 오려 내어,
캔버스 규격 및 표준 화면비를 기준으로 17종의 판형,
100여 개의 조각을 추출해 실제 캔버스 천에 출력하고, 전시 공간의 해당 자리에 설치했다.

윤향로, 〈:)◆30F-3〉, 2020, 캔버스에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90.9x72.7cm ©Documents Inc.
한편 회화 작업에서 윤향로는 헬렌 프랑켄탈러가 고전 회화를 참조해 작업한 사례를 발췌해 다시금 자신의 회화 언어로
재참조하는 과정을 거쳤다. 작가는 발췌한 페이지들에 등장하는 회화와 연관된 단어 또는 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She, her 등)를 캔버스에 출력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과 연관된 드로잉을 중첩시켰다.
이로써 화면 속 각각의 층위가 저마다 다른 서사와 표현을 드러내는데, 이는
마치 앞선 세대 작가의 기록으로부터 현재 윤향로의 삶으로 이어지는 시공간의 연대표 위에서 세 차례 포착한 ‘스크린샷’들을 한 화면 위에 중첩해 놓은 듯한 모습을 띈다.
화면의 층위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책에서 발췌한 타인의 기록은 화면의
기반이 되고, 그 위에 에어브러시로 채색한 회화의 층이 쌓인다. 가장
바깥 층에는 어린아이의 낙서를 모아 오일 바로 재현한 드로잉이 얹힌다.

윤향로, 〈ː)◆10F-3〉, 2020, 캔버스에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53x45.5cm ©Documents Inc.
암호문을 연상시키는 작품명은 자화상을 표현하는 이모티콘, 설치 벽면을
가리키는 도형, 캔버스 규격을 나타내는 호수의 조합이다. 이를
테면, 〈ː)◆10F-3〉(2020)는
‘◆’로 지칭한 벽면에 걸린 ‘10F’ 규격의 캔버스 중
세 번째 작품이라는 의미다.
각 회화들은 개별 작품으로서 독립성을 가지는 동시에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가령 몇몇 화면 위에 푸른 직사각형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이는
매핑 작업 시 프로그램 특성상 서로 다른 벽면에 같은 이미지가 생겨나는 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작가는
이 ‘공통분모’ 영역을 푸른 반투명 막으로 형상화 함으로써
캔버스들 간 구조와 연결성을 드러냈다.

2022년부터 진행해온 ‘Tagging’
시리즈는 고대 로마 시대 자신의 이름을 건축물에 새겨 넣는 1세대 그래피티 기법인 ‘태깅(Tagging)’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태깅은 창작자의 서명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서
위치와 장소, 사람 등을 불러와 자신의 영역에 중첩시키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다.
이 작업에서 윤향로는 그래피티를 하듯 물감을 캔버스 위에 분사하고, 참조하는
시간과 공간 경험을 ‘태깅’해 캔버스 위로 불러들인다. 여러 층으로 쌓인 캔버스 위의 물감 입자들은 작가의 신체적 행위와 물감의 물질성, 그리고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을 함께 소환해 내며 다층적인 레이어를 형성한다.

Hall1에 전시된 작품 〈Tagging-H〉(2022)의 표면에는 어두운 화면 층 사이로 알파벳들이 희미하게 나열되어 있다.
거대한 화면에 흐릿하게 새겨진 알파벳을 읽기 위해서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세히 들여다 봐야한다.
겨우 조합된 문장은 고대 폼페이의 어느 벽에서 발견된 낙서로 “이
벽에 글을 쓴 많은 사람들의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너지지 않은, 이 벽을 나는 경외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고대 폼페이라는 상이한 시공간에서 온 이 문장은
작가의 ‘태깅’을 통해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회화적
코드로 변주되고 이질적인 요소들과 뒤엉키게 된다.

최근 개인전 《Mirae》(미래빌딩, 2024)에서 작가는 천장화 형식으로 뒤섞인 시간과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풍경을 제시했다. 천장의 건축적 구조에 맞춰 설치된 회화 〈미래: 하늘과 뿌리를 위한
지도〉(2024)는 기존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캔버스 위에 잉크젯으로 인쇄된 레이어와 에어브러시로 분사된
물감의 층위가 중첩된 표면을 가진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캔버스 26장을 천장에 이어 붙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비스듬한 건물의 천장을 뒤덮은 이 작품은 마치 별이 수놓아져 있는 밤하늘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빈백 소파를 활용해 원하는 위치에서 자유롭게 작품을 올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작품은 2023년 여름 오키나와에서의 리서치 트립 중 작가가 촬영한
동굴 사진에서 출발한다. 이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두 동굴 ‘치비치리 가마’와 ‘시무쿠 가마’를 배경으로 한다. 두
동굴 모두 주민들의 피난처로 활용되었지만, 치비치리 가마에서 주민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 한편 시무쿠
가마에서 주민들은 삶을 택했다.
작가는 두 동굴에 얽힌 역사를 알아가던 중 발견한 문장 “생과 사를
나눈 것은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리며, 이를 도래하지 않은
미래와 연결 지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동굴은 삶과 죽음의 경계지이자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작가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신체적 행위로써 손에 닿지 않는 모호한 미래의 감각을 공유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 그리고 과거로부터 미래를 그리는 그의 작품은
선형적인 시간의 축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무수한 가능의 미래들을 상상하도록 한다.
이처럼 윤향로는 자신의 신체적 행위를 통한 회화의 방법론과 디지털 이미지의 제작 방식 등을 오가며 동시대의 풍경을
화면 안에 중첩시킨다. 그의 ‘유사 회화’는 단지 미디엄으로서 회화 자체를 지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작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그 안팎으로 엉킨 무수한 요소들을 재매개하여 다층적인 내터리브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회화는 세계에
대한 스크린샷이다" (윤향로, 학고재 《캔버스들》 리플렛)

윤향로는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조형예술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Mirae》(미래빌딩, 서울, 2024), 《Drive
to the Moon and Galaxy》(Gajah Gallery, 족자카르타, 인도네시아, 2023), 《태깅》(Hall1,
CYLINDER, 서울, 2022), 《캔버스들》(학고재, 서울, 2020), 《Liquid
Rescale》(두산갤러리, 뉴욕, 2017)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2018 광주비엔날레
(2018), 서울시립미술관 (2018), 소더비 인스티튜트 뉴욕 (2017), 아뜰리에 에르메스 (2017), 일민미술관 (2015), 국립현대미술관 (2014), 플랫폼 인 기무사 (2009) 등 주요 기관 단체 전시에 다수 참여하였다.
윤향로는 금천예술공장(2024), 캔파운데이션 명륜동 작업실(2023),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20), 두산레지던시
뉴욕(2017),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15) 등의
레지던시에 입주한 이력이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인천아트플랫폼, 아라리오뮤지엄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
- 윤향로, Hyangro Yoon (Artist Website)
- 금천예술공장, [금천예술공장 15기 입주작가] 윤향로
- 캔파운데이션, 2023 명륜동작업실 – 윤향로 (CAN Foundation, 2023 Myeongnyundong Studio - Hyangro Yoon)
- 두산아트센터, Liquid Rescale (DOOSAN Art Center, Liquid Rescale)
- 학고재, [보도자료] 캔버스들 (Hakgojae, [Press Release] Canvases)
- 뉴스프링프로젝트, 언박싱프로젝트 – 윤향로 작가 소개 (New Spring Project, Unboxing Project – Hyangro Yoon)
- 퍼블릭아트, 윤향로_태깅
- 퍼블릭아트, 윤향로_Mir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