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윤(b. 1990)의 조각은 사회와 개인 그리고 공동체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힘의 관계 안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존재들의 양태를 관찰하고 이를 참조하여 작업한다. 동세, 몸짓, 표정 등을 포함하는 신체를 가진 현정윤의 조각 군상은 유연한 연대적 상황을 그린다.  

《Walking on tiptoes》 전시 전경 (주영한국문화원, 2018) ©현정윤

현정윤의 작업은 신도시라는 공간에서 태어나 또 다른 신도시로 옮겨 다니며 배우고 느낀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이미 체계가 구축되어 계획적인 시스템이 작동하는 공간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 이동하며 또 다른 시스템을 익히는 것이 습관화된 작가의 경험은, 자연스레 공간(특히 도시), 개인, 그리고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관계와 그것이 사람들의 일상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현정윤, 〈I see you from here〉, 2018, 제스모나이트, 제스모나이트 안료, 아크릴 물감, 나무, 페인트, 강철, 36x50x39cm ©현정윤

2018년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열린 개인전 《Walking on tiptoes》에서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다시 한번 이주를 하게 되며 이방인으로서 느낀 감각들을 조형화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도시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개인 사이의 관계를 ‘바닥’과 ‘발’이라는 소재로 형상화했다. 가령, 까치발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는 신체의 찰나적인 동세를 포착한 조각 〈I see you from here〉(2018)는 작은 지지대 위에 놓인 채 벽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현정윤, 〈Retirement〉, 2018, 석고, 석고 안료, 시멘트, 실리콘, 실리콘 안료, 이동용 바퀴, 도어 스토퍼, 165x260x42cm ©현정윤

그리고 현정윤은 이동용 바퀴, 도어 스토퍼, 카펫, 자물쇠와 같은 일상적인 사물들을 ‘비기능적(non-functional)’ 오브제로 변신시키며 도시라는 공간 속 현대인의 감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일상 사물에 스테인리스 파이프, 스티로폼, 시멘트, 실리콘 등의 재료를 혼합하여 이질적인 조합의 조각을 만들어 낸다.


현정윤, 〈On My Knees〉, 2019, 스테인리스 파이프, 우레탄 도장, 오일 바, 시바툴, 65x74x23cm ©현정윤

특히 작가는 가속화된 현대사회 안에서 늘 이방인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도시인의 절망과 억압의 감정을 조각적 상황으로 연출한다. 그리고 그의 조각들은 마치 인간의 동작을 본뜬 것처럼 의인화된 상태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On My Knees〉(2019)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외형의 조각이 마치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You Again》 전시 전경 (os, 2019) ©현정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제목이 일종의 힌트가 되어 작업에 생동감과 연극성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작가는 조각이 공간에 어떻게 위치하는지에 따라 조각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즉 조각의 시선과 역할을 설정한다.  

다시 말해 현정윤은 그의 조각이 배우가 되고 전시공간은 무대가 되는 상황을 연출하며, 화이트큐브에 매끈하게 전시된 조각의 성격을 넘어서는 특정한 상황을 제시한다.

현정윤, 〈On my way 1〉, 2019, 석고, 스티로폼, 도어 스토퍼, 30x37x43cm, 〈On my way 2〉, 2019, 석고, 석고 안료, 스티로폼, 도어 스토퍼, 35x43x21cm, 《You Again》 전시 전경 (os, 2019) ©현정윤

2019년 현정윤의 국내 첫 개인전 《You Again》에서는 동일한 차이와 소외의 구조를 가지고 찾아올 미래에 대한 무력한 감정을 조각들의 설치로 풀어냈다. 전시 제목 “You Again”은 “이렇게나 멀리 도망쳐 뛰어왔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또 너구나”와 같은 뉘앙스의 말로, 계속해서 동일한 대상을 마주할 때의 힘없는 탄식같은 말이다.  

전시는 그러한 대상을 마주했을 때의 주체의 감정을 닮은 조각들과 “You”라는 미래를 닮은 조각들로 구성되었다. 무력한 감정은 이리저리 꺾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의 쇠 파이프(〈On My Knees〉), 벽에 축 쳐진 채 매달려 있는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멀티 어댑터 조각(〈”I know” (with a sigh)〉) 등으로 표상되어 나타난다.

현정윤, 〈Cooling my heels 4〉, 2019, 제스모나이트, 스티로폼, 체인, PVC, 자물쇠, 60x91x38cm, 〈Cooling my heels 5〉, 2019, 제스모나이트, 스티로폼, 체인, PVC, 자물쇠, 29x47x26cm, 《You Again》 전시 전경 (os, 2019) ©현정윤

한편 자전거 자물쇠를 달고 옆에 없는 자전거를 망부석처럼 지키는 〈Cooling my heels 4, 5〉와 도어 스토퍼를 몸 양쪽에 지네 다리처럼 달고 있으나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지 않는 상태에 놓인 〈On my way〉는 미래를 향해 적극적으로 돌파해 나가기를 유예하며 ‘잠시 쉬어가는 중’인 분열적인 합리화의 태도로 읽힌다.  

이러한 ‘비기능적’인 조각들은 불합리한 상황임에도 이도 저도 못하는 작가 자신의 답답하고 무력한 상황을 자조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현정윤, 〈울며 수영하기〉, 2020, 에어드라잉 클레이, 실리콘, 수경, 스티로폼, 합판, 38x68x26cm, 《울며 수영하기》 전시 전경 (송은아트큐브, 2020) ©현정윤

한편 이듬해 송은아트큐브에서 열린 개인전 《울며 수영하기》에서 현정윤은 특정한 미래가 반복되는 이유와 권력의 재생산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따뜻한 파스텔톤 색감으로 이루어져 있어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무해하나, 가까이 다가가면 슬며시 이중성을 드러낸다.  

전시명과 동일한 〈울며 수영하기〉(2020)는 물이 들어오지 않게 수경을 꽉 조여 썼음에도 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스며 들어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과 눈물을 보이지 않고 울기 위해 수영하는 두 개의 상황을 지시한다.

《울며 수영하기》 전시 전경 (송은아트큐브, 2020) ©현정윤

〈내가 너의 곁에 살았다는 걸〉(2020)의 경우에는 바닥에 깔린 철망 사이로 피해자와 가해자 중 어느 역할인지 불분명한 조각들이 서로 엉킨 채 피어 오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이 전시에 놓인 조각들은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불분명한 상태로 뒤엉켜 있다.  

이런 의문 투성이의 환경에서 작가는 모든 상황을 관조하고 있는 〈오래 사는 꿈〉(2020)을 통해 마지막으로 공간과 주위 작업들의 관계를 관객이 직접 질문하게끔 유도한다.

《젊은 모색 2021》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2021) ©현정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젊은 모색 2021》에서 현정윤은 자본주의와 같은 거대한 사회의 시스템에 좌절하거나 무력감을 표상하는 조각이 아닌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에 자의적으로 동화된 조각들을 선보였다.

현정윤, 〈Gently holding you〉, 2021, 알루미늄, 레진, 실리콘, 76x122x210cm, 《젊은 모색 2021》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2021) ©현정윤

이전 조각 작업에서는 파이프 클램프, 벽, 체인, 철망 등 공간의 구조나 조각에 결부되었던 구조물들이 조각의 의지나 행위를 방해하는 듯 보이거나, 조각이 가진 신체의 의지와 신체를 억압하는 구조물들의 힘의 방향이 어긋남으로써 무력하게 보이는 상태로 전시되었다.  

그러나 《젊은 모색 2021》에서 선보인 조각의 신체는 그러한 구조물들을 오히려 자신의 뼈나 살인 것처럼 편안하게 장착하고 있거나 스스로 결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정윤, 〈Dancing Spiral 2, 3〉, 2023, 레진, 스틸 파이프, 실리콘, 실리콘 안료, 187x90x40cm, 80x240x80cm, 《오프사이트》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2023) ©아트선재센터

최근 현정윤은 계속해서 자라나고, 분화하고,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호한 형태의 조각들을 선보이고 있다. 생명체를 연상시키지만 종과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기이하고 과장된 몸체를 가진 그의 조각들은 촉촉한 점액질로 뒤덮이는 등 촉각적이고 생성적인 특성을 가진다.
 
이를 테면 〈Dancing Spiral 2, 3〉(2023)은 차갑고 딱딱한 철 파이프 위로 분홍색의 실리콘과 레진이 살점처럼 붙고, 관능적인 모습으로 꼬여 있다. 이는 마치 살덩어리를 이루는 재료들의 생성적인 힘이 단단한 파이프가 가진 직선의 힘을 역전해 조각의 몸체를 유연하게 뒤틀고, 서로의 힘이 융화되어 힘의 관계가 모호한 상태에 머물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조각의 촉각성과 생성적 특질, 그리고 모호한 힘의 운동성은 눈에 보이는 고정된 상태를 넘어 조각의 전후 상황 혹은 그것이 연상시키는 비가시적인 상황으로 관객을 유인하며 모종의 조각적 시공간을 상상하도록 한다.

현정윤, 〈Feeling you and Feeling me〉, 2023, 실리콘, 실리콘 안료, 썬베드 라운저, 수건, 56x195x55cm, 《오프사이트》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2023) ©아트선재센터

현정윤은 이러한 조각을 통해 관객과 상호주체적인 관계를 맺고자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맥락에 따라 조각의 시선과 역할을 설정하여, 주어진 공간 및 다른 조각과 관계를 생성해 나가는 주체적인 개체로 조각을 재위치시킨다. 그의 작업은 그러한 조각들이 이루는 공동체를 통해 현재 사회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의 양태를 떠올리게 한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조각들이 어떠한 태도나 상태로 공간에 존재하거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 조각들은 어떠한 공동체를 그리고 있는지를 통해서 현재 사회구조와 시스템 속에 일상을 영위하는 존재들의 양태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이 조각에게 일어났거나 일어날 법한 앞뒤 상황을 상상하거나, 조각이 할 수 있거나 하지 못 하는 일 등을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정된 상태의 조각이지만 말입니다.”
  (현정윤,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1》 인터뷰 중) 

현정윤 작가 ©노블레스. 사진: 안지섭.

현정윤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와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했으며, 서울과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전으로는 로 《See you down the road》(팩토리2, 서울, 2021), 《울며 수영하기》(송은아트큐브, 서울, 2020), 《You Again》(OS, 서울, 2019) 등이 있다.
 
아울러 작가는 《UNBOXING PROJECT 3: Maquette》(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4), 《오프사이트》(아트선재센터, 서울, 2023), 《SUMMER LOVE 2022》(송은, 서울, 2022), 《젊은모색 2021》(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현정윤은 금천예술공장(2022),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21)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