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b. 1990)은 동시대의 풍경과 사회적 현상을 조각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의 조각은 광대한 자연의 풍경을 축소하는 ‘축경(縮景)’이라는 개념을 경유한다. 수석(壽石), 분재(盆栽), 석가산(石假山) 등 동양의 원예 문화에서 사용되는 기예 중 하나인 축경은, 단순히 풍경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자연에서 물질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 그 자체에서 풍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작은 풍경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축경의 방식에 따라 작가는 매일 마주하는 동시대의 광범위한 세계를 작은 조각 안에 압축하여 도시풍경의 현재와 미래를 담아내고 있다.

현남, 〈뒤집힌 도시〉, 2019, 에폭시 레진, 안료, 시멘트, 폴리스티렌, 19x18x11cm ©현남. 사진: 양이안.

현남은 자신의 예술적 키워드인 축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연에서 발견한 사물 그 자체를 작은 풍경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에도 조그만 돌덩어리 하나가 거대한 산수를 닮는 이유는 해당 사물이 자신을 담고 있는 풍경과 동일한 구성 성분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일한 퇴적, 침식, 풍화와 같은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물질의 원리를 충실히 따랐을 뿐임에도, 작은 파편이 자신의 내부에 그가 속한 세계 전체를 새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저는 큰 감동을 느꼈다.”

현남, 〈텅 빈 절벽〉, 2020, 에폭시 레진, 폴리우레탄 레진, 안료, 시멘트, 합성모, 폴리스티렌, 51x20x14cm ©현남. 사진: 김상태.

이처럼 기후, 지리적 조건에서의 물질 작용이 빚어낸 사물에 새겨진 풍경에 주목한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풍경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일상 속 가장 보편적인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현남은 조각의 재료로 폴리스티렌과 에폭시, 시멘트와 같은 도시 건축물의 피하조직이나 표피를 구성하는 산업 재료들을 택했다. 그리고 축경이 물리적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형태를 기반으로 하듯이 작가 또한 동시대의 풍경을 이루는 재료들이 가진 물성을 다양한 물리적 방식으로 실험하며 조각을 만들었다.

《축경론》 전시 전경(공간 형, 쉬프트, 2020) ©현남

현남의 첫 번째 개인전 《축경론》(공간형, 쉬프트, 2020)에서는 작가만의 조각적 언어로 해석한 동시대의 축경을 펼쳐 놓았다.
 
전시에서 선보인 조각들은 자신이 직접 보았던 일산 야산의 사물들, 도시의 랜드마크, 도심 속 인공물 등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기획 노트에서 “수평적이고 가시적인 성질의 풍경을 수직적이고 물질적인 조각으로 재구성”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에폭시, 폴리스티렌 등 재료의 물성 및 캐스팅, 모델링과 같은 전통적인 기법을 변주하고 왜곡하며 이루어졌다.


《축경론》 전시 전경(공간 형, 쉬프트, 2020) ©현남

그렇게 만들어진 수직적인 조각들은 “뒤엉키며 녹아내리고, 과열되어 깨지거나 부풀어 오르고, 산만하게 바스라지고 어긋난” 모습을 가지며, 하나의 축소된 풍경인 동시에 거대한 풍경의 파편으로 제시된다.   

풍화와 침식 작용에 의해 변형된 작은 돌이 거대한 풍경을 축소해 담듯이, 현남은 현대적이고 산업적인 합성 재료가 가진 물성의 반응을 통해 고도화된 산업 저변의 피상적 성질을 물질화하고, 동시대의 사회적 현상과 구조를 작은 사물에 압축한다.

현남, 〈축산(쌍봉)〉, 2020, 에폭시 레진, 폴리우레탄 레진, 안료, 시멘트, 합성모, 폴리스티렌, 85x25x15cm ©현남. 사진: 양이안.

현남의 작업은 일종의 ‘채굴’ 행위로 빗대어 볼 수 있다. 작가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자면, 우선 폴리스티렌에 구멍을 뚫고 그 자리에 나머지 재료를 흘려 넣어 굳힌 뒤 최종적으로 폴리스티렌을 녹여 없앤다.  

이는 예측이 힘든 내부 공간을 결과물로 삼는 네거티브 캐스팅이자 재료들 사이의 화학반응이 야기할 무작위적인 변형마저도 수용하는 행위이다. 아래로 흘러내리며 완성된 형태를 뒤집어 전시하게 되는 작품은 상승하는 수직의 조형물이자 첨탑, 고층의 도시 풍경으로 확장된다.

현남, 〈축산(단봉)〉, 2020, 에폭시 레진, 폴리우레탄 레진, 안료, 시멘트, 합성모, 폴리스티렌, 78x19x14cm ©현남. 사진: 양이안.

기포가 빠져나가면서 남긴 거친 표면과 형광에 가까운 강렬한 색감의 조각은 마치 SF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수직적인 폐허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현남의 조각을 이루고 있는 밝고 채도가 높은 색상은 작가가 평소에 접했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인터넷 등 문화산업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이러한 대중적인 산업문화 안에서 인스턴트하고 자극적이며 유치한 동시에 유해하고 비현실적인 성질을 지닌 색상들을 뽑아낸다. 그러나 밝고 강렬했던 색상은 굴 안에 재료를 녹이는 작업 과정 속에서 변색이 되거나 얼룩이 지기도 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라고 부패해 썩기도 한다.

현남, 〈기지국〉, 2020, 에폭시 레진, 안료, 시멘트, 황동, PVC, 폴리스티렌, 40x40x205cm ©현남. 사진: 김상태.

‘채굴’은 물리적인 조각의 방법론을 설명할 뿐 아니라 현실을 배회하면서 조각적으로 보이는 수직 구조물을 발견하고 탐사하는 개념적 행위까지 포괄한다. 예를 들어, 〈기지국〉(2020)은 작가가 도시 곳곳은 물론 전국 전체에 분포되어 있으나 좀처럼 주목되지 않는 기지국을 대상으로 삼는다.  

작가는 기지국을 현대적인 첨탑으로 간주하면서, 무선통신 서비스라는 첨단의 기능에 어울리지 않는 그로테스크한 조형성을 떠올렸다. 그는 기지국의 시각적인 특성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성,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동시에 위협하는 인터넷의 물리적 몸체로서 인식하며 〈기지국〉을 제작했다.

현남, 〈아토그(고딕)〉, 2021, 에폭시 레진, 안료, 시멘트, 유리섬유, 황동, 나무, 폴리스티렌, 150x90x78cm,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 전시 전경(아뜰리에 에르메스, 2021) ©현남. 사진: 김상태.

한편, 2021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에서 선보인 〈아토그(Atog)〉(2021)는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조각 시리즈 중 ‘아키텍톤 고타(Architekton Gota)’(1923)를 모티프로 하여 만들어졌다.  

현남은 유토피아적이고 미래적인 도시를 작은 조각으로 만든 말레비치의 작업을 보며 작은 조각이 커다란 풍경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축경의 감각과 유사하다고 보았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보고자 〈아토그〉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남, 〈아토그(고딕)〉(세부 이미지), 2021, 에폭시 레진, 안료, 시멘트, 파이버글라스, 황동, 나무, 폴리스티렌, 150x90x78cm,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 전시 전경(아뜰리에 에르메스, 2021) ©현남. 사진: 김상태.

‘고타(Gota)’의 알파벳 순서를 거꾸로 바꾼 작품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현남은 〈아토그〉에서 반복하면서도 대립하는 방식으로 과거와 미래를 다룬다. 작품은 당대 서유럽 모더니즘 건축의 수평성과 대비되는 수직 건축의 가능성을 다루며 미래의 건축으로 제시된 ‘고타’의 입방체를 차용하면서도 러시아 절대주의자가 꿈꾸었던 매끈한 순백의 추상과는 거리가 먼 어두운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도시의 풍경을 드러낸다.

현남, 〈연환계〉, 2022, 에폭시 레진, 폴리우레탄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시멘트, 활석, 파이버글라스, 플라스틱 체인, 스테인리스 스틸 카라비너, 폴리스티렌, 가변크기, 2022 부산비엔날레 설치 전경 ©현남

2022 부산 비엔날레에 출품한 설치 작품 〈연환계〉(2022)의 경우에는 오늘날 전 지구적 통신 체계인 해저 케이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지상과 해저, 우주를 가로지르며 연결된 네트워크 기술은 금융 거래, 통신, 물류, 군사의 영역을 넘나들며 거대한 권력과 긴밀하게 엮여 작동한다.  

현남은 이러한 기술과 권력의 관계를 크고 작은 조각들이 저마다의 구멍을 통과하는 사슬로 이어지고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형상화했다. 작품의 제목인 ‘연환계’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방통이 적의 군함들을 모두 사슬로 묶어 군선에 불을 놓아 승리를 거눈 교묘한 계책을 의미한다. 제목처럼 사슬처럼 묶인 채 서로 연결된 조각들은 위태로운 구조 안에서 기존 구조물에 기생하며 공간을 점유한다.

현남, 〈공축(트리니티)〉, 2022, 에폭시 레진, 폴리우레탄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시멘트, 활석, 파이버글라스, 폴리스티렌, 80x33x31cm, 《투 투(Two Tu)》 전시 전경(휘슬, 2022) ©현남. 사진: 김경태.

한편 ‘공축’ 시리즈는 물질이 비어 있는 상태가 견고한 물질로 역전되는 상황을 가시화한다. ‘공축’에서는 기존 작업 방식과 달리 구 형태의 작은 덩어리를 깎고 쌓은 후 유리섬유와 에폭시를 섞어 만든 막으로 주변을 둘러 큰 덩어리를 만드는 과정을 한 단계 더 거친다.  

이후 작가는 여러 개의 구로 형성된 덩어리 내부에 다른 재료들을 부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화학 작용을 발생시킨다. 이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몸체를 녹여 없애야만 확인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물질(구)이 있던 자리에는 구멍만 남게 되고 텅 비어 있던 공간에는 물질이 자리 잡게 된다.

현남, 〈연환계〉, 2022, 에폭시 레진, 폴리우레탄 레진, 안료, 아크릴 물감, 시멘트, 활석, 파이버글라스, 플라스틱 체인, 스테인리스 스틸 카라비너, 폴리스티렌, 가변크기, 《오프사이트》 전시 전경(아트선재센터, 2023) ©현남

이처럼 현남은 광범위한 세계의 이면과 외연을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으로 전환시키고 작은 조각의 형태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조각의 논리에서 벗어나 재료의 물성을 극화시키고 교란시키는 조각적 행위로써 그가 속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들을 표현하며, 좌대 위의 조각을 넘어서는 공간적 상상을 유도한다.

”손으로 물질을 다루어 어떠한 형태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 중 하나이며, 여기에는 조각이라는 관습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각에는 여러 가지 재료와 도구, 번거로운 공정과 절차가 요구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무게를 갖고 실재하는 공간에서 거추장스럽게 부피를 차지하며,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동시에 조각을 다른 그 어떤 행위보다도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으로 만듭니다. 저는 이러한 조각의 솔직함을 통해 제 앞에 놓인 세계를 재구성해보며, 그것의 본질을 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현남, 아뜰리에 에르메스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 인터뷰 중)

《Appearances》 전시 전경(G Gallery, Frieze No. 9 Cork Street, 2023) ©우한나

현남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개인전으로는 《카와 오졸(Kawah Ojol)》(ROH Projects, 자카르타, 2024),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2021), 《역시 내 장년 성지순례기는 잘못됐다》(인스턴트 루프, 서울, 2021), 《축경론》(공간형 & 쉬프트, 서울, 2020)이 있다.
 
또한 작가는 《원더랜드》(리만머핀, 서울, 2024), 《공중정원》(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2023), 《오프사이트》(아트선재센터, 서울, 2023), 2022 부산비엔날레, 《구름산책자》(리움미술관, 서울, 2022), 《OPENING CEREMONY》(YPC Space, 서울, 2022) 등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현남은 2023-2024년 인도네시아 RHO Projects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