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포드의 작업은 종종 ‘사회적 추상(social abstraction)’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이 용어는 추상이라는 개념의 토대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윤리적·정치적 함의를 절반쯤 지워내는 제도적 수사에 더 가깝다.
 
추상은 역사적으로 이야기와 맥락을 제거하는 방향에서 형성된 개념이지만, 브래드포드의 추상에는 특정한 인종, 계급, 도시 구조의 흔적이 직접적으로 남아 있다. 이 흔적들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특정 공동체가 실제로 겪어온 현실을 담은 정보의 잔재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추상적 구성 속에 재배치되는 순간, 내용은 흐릿해지고 의미는 암호화되며 정치적 날카로움은 약화된다.
 
결국 그의 작업은 추상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며, 정치적 실천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무해한 지점에 놓인다. 이 모순적 긴장이 바로 브래드포드 작업이 자리하는 공간이며, ‘사회적 추상’이라는 말은 이러한 불안정성을 덮기 위한 제도적 표현일 뿐이다.



조형적 밀도의 결여

브래드포드의 작업이 강한 시각적 첫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각적 충격이 구조적 완성도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의 표면은 긁기, 찢기, 중첩이라는 유사한 방식이 반복되며 형성되는데, 이는 의도적 조형 판단이라기보다는 재료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우발적 과정에 더 가깝다. 대형 캔버스는 깊이가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세부로 들어가 보면 조형적 판단은 느슨하고 반복적이다. 추상회화의 역사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온 구조적 긴장과 색면 구성은 그의 작업에서 결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점은 브래드포드의 작업을 ‘확장된 추상회화’로 해석하는 일반적 담론이 그의 조형적 무게를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표면의 복잡성이 곧 조형적 깊이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그의 작업은 이 간극을 충분히 메우지 못한다.



낡은 담론의 재배열

오늘날 브래드포드의 작업을 혁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1990~2000년대 미국 미술의 중요한 계보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기관과 비평가들은 인종, 도시 폭력, 빈곤, 계급 분열, 젠트리피케이션을 핵심적 주제로 다뤄왔다. 특히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이러한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시기 많은 작가들이 사회 구조와 폭력 시스템을 추상적, 도식적, 상징적 언어 또는 물질적 흔적으로 변환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실험했다.

특히 데이비드 해먼스(David Hammons)와 베티 사(Betye Saar)와 같은 흑인 작가들은 브래드포드보다 훨씬 이전부터 구조적 인종주의, 도시의 균열, 흑인 공동체의 기억과 폭력을 회화·조각·콜라주적 언어로 치환하는 전략을 구축해왔다.

해먼스는 도시의 파편과 신체적 흔적, 거리의 재료를 정치적 기호로 변환하며 제도 비판과 흑인 정체성의 감각을 전면화했다. 사는 흑인 여성의 역사와 가족, 민권운동을 아상블라주(Assemblage)로 구성하며 인종주의적 이미지의 전복을 일찍부터 실천했다. 이들의 작업은 사회적 힘과 폭력, 공동체의 기억을 시각적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조형적·개념적 어휘를 이미 확립해 놓았다.

이러한 계보를 고려하면, 브래드포드가 다루는 주제—도시의 균열, 인종정치, 흑인 커뮤니티의 역사적 잔여—는 새로운 제안이라기보다 이미 제도적으로 승인된 담론을 재포장한 형태에 가깝다.
 
그의 작업은 추상과 사회 현실을 결합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흑인 예술 실천에서 축적되어 온 언어적·물질적 전략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브래드포드는 전위적 혁신가라기보다 시장과 제도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재맥락화된 작가의 위치에 놓인다.



정치성의 안전화와 제도적 편의성

브래드포드의 작업은 인종과 계급을 다룬다는 이유로 종종 정치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작업이 수행하는 정치성은 제도적 요구에 맞춰 조정된 형태다. 갈등은 구조적 흔적으로 약화되고, 폭력은 추상적 패턴 속으로 흡수되며, 메시지는 모호한 은유로 분산된다.

이러한 방식은 급진적 정치성을 제도미술관이 수용 가능한 미적 신호로 변환한다. 이는 오늘날 글로벌 미술 제도가 선호하는 방식—정치적 내용을 품고 있지만 실질적 비판성은 제거된 형태—과 정확히 일치한다. 브래드포드의 작업은 ‘소비 가능한 급진성’, 즉 위험하지 않은 정치성을 제공한다.

경계에 머무는 작가

브래드포드는 추상과 정치의 경계를 확장했다고 평가받지만, 실제로 그의 작업은 그 경계를 넘어서기보다는 그 위에 머물며 균형을 유지한다.
 
추상 개념과 재료의 구체성 사이의 충돌, 느슨한 조형 판단, 선행 담론의 반복, 제도적 유통에 최적화된 정치성—이 모든 요소는 그의 언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제도적 요구에 의해 조율된 산물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브래드포드의 전시를 비평적으로 읽는 행위는 개별 작품을 넘어서, 오늘날 미술 제도가 ‘정치적’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제거하는지, 그리고 정치성의 형식이 어떤 힘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전시가 던지는 본질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 정보

전시 제목 :《Mark Bradford: Keep Walking》
전시 기간 : 2025.08.01.(금) – 2026.1.25.(일)
전시 장소 : Amorepacific Museum of Art,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100
관람 시간 : 휴관일: 화–일 10:00–18:00, 월요일 및 1월 1일, 설·추석 연휴 휴관
전시 구성 : 회화, 설치, 영상작품 포함 약 40점. 대표작으로는 2005년작〈Blue〉,〈Niagara〉, 2019년 설치작〈Float〉등이 포함되며, 미술관을 위해 제작된 신작 시리즈 포함.
입장료 : 성인 16,000원 (청소년·대학생 등 할인 요금 있음)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